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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건 Jan 11. 2021

당신으로 망명합니다.

그러니 날 사랑해줘요

나는 불탔다 몸서리치는 언어를 반죽하여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아침의 모든 것들과 저녁의 모든 것들과 밤의 모든 것들이

곧 몰려올 것이기에 이 악물고 참았다


- 박서영 「입술, 죽은 꽃나무 앞에서」부분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박서영 시인의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를 두고 이런 글을 썼다. “사랑은 서로에게 망명하는 일이고, 그 망명의 환대 속에서 영혼이 합일하는 일이다.”(시집 해설) 그러나 이 문장에 대한 논의는 사실, 시집을 통해서는 불가능했다. 박서영 시인의 시편들은 “우리는 아무도 서로에게 망명한 적 없어”(「삵」)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공한 사랑보다는 미결의 그리고 파멸의 사랑을 다뤘다는 것. 그래서 '서로에게 망명하는 (사랑에 성공한) 연인의 양태'를 포착할 수 없었으나 대신 망명 직전의 상황 혹은 망명에 실패한 상황에서 시인이 느끼는 고통의 정교한 기록은 읽어낼 수 있었다. 앞서 인용한 시「입술, 죽은 꽃나무 앞에서」는 서로에게 망명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다시 말해 자신의 폐허에서 더는 살 수 없음에도 망명하지 못해 고통을 감내하는 상황에 대한 시로 읽힌다. 나는 이 고통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몇몇 음악에 적절한 각주를 달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알맞은 곡이 있다. 전기뱀장어 <별똥별>이다.


음악의 화자는 일단, 사랑에 실패한 듯하다. 이 실패는 한때의 성공을 암유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의 실패를 일컫는다. “내가 더 괜찮은 놈이었다면 넌 날 좋아했을까”라고 읊조리는 화자의 모습이 그가 양방향적 사랑(우리가 흔히 연애라고 말하는 것)에 이른 적 없음을 보인다. 그러니까 이 곡은 사랑의 과정을 복기하고 실패의 까닭을 유추하여 다음의 성공을 다짐하지 않는다. 여전히 실패의 그림자에 얽매여 가사처럼 “바보 같은 사랑 노래(stupid love song)”를 부를 뿐이다. 그래서 분명 <별똥별>은 짝사랑의 쓴맛을 입안에 담은 독백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독백이 “넌 나의 회전축이 기우는 소리를 듣고 있어”라는 가사에 가닿을 때, 우리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비련보다는 감격과 낭만을 느낀다. '나'의 독백을 '너'는 당최 어떻게 들었으며('너'는 부재하는 상황임에도) 화자가 그것을 확신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를 '동화적 상상력에 기초한 초현실적 비유'의 역할으로 일축할 수 있을까? 독백을 독백이 아닌 어떤 요청으로 듣는다면, 정확히 말해서 두 번째 고백(첫 번째가 이미 실패했음은 '너'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가 알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으로 듣는다면 우리의 감상은 꽤 명징해진다.


내가 더 괜찮은 놈이었다면 넌 날 좋아했을까

...

넌 마치 별똥별처럼 / 나의 우주를 가로질러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 지구의 회전축이 기우는 소리를 듣고 있어

Stupid love song


- 전기뱀장어 <별똥별> 부분


이 모호한 낭만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다. '너'라는 별똥별이 가로지르는 '나'의 우주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자 '나'의 심장이다. 기울어지는 지구는 사랑의 실패에서 기인한 고통의 표상일 것이다. 그 고통의 촉발은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별똥별이 우주를 가로지르지만 그것은 지구의 회전축을 기울일 수 없고, 별똥별이 우주를 가로지르지 않았다면 지구의 회전축은 기울어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별똥별은 어떠한 작용도 없이 그저 가로질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현상은 우리가 흔히 사랑의 주체라고 오해하는 '나(지구)'나 '너(별똥별)'의 작용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불가항력의 작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불가항력으로 인해 심장이 기울어진 우주는 온통 폐허다. 폐허가 된 세계에서의 “아침의 모든 것들과 저녁의 모든 것들”을 '나'는 견디기 어렵다. 그야말로 고통이다. 그런데 누구도 사랑의 힘에 대적할 수 없으므로 지구의 회전축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시인처럼 “이 악물고 참”거나, 망명해야 한다. 어디로? '너'에게. '너'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한 '너'의 세계는 아직 기울어지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 이 곡은 처음부터 독백이 아니었다. '너'를 사랑함으로 인해 '나'의 세계가 이렇게 어질러졌으니, 당신으로 망명하겠다는 전언이자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요청이었다. 따라서 '너'는 이 고백을 듣는다. 결말은 둘 중 하나다. 당신의 세계도 기울어져, 유이한 기울기의 세계를 함께 살아가거나, 아니면 당신의 세계와 나의 세계의 다른 기울기로 인해 홀로 고독하거나.


이 고백은 성공할 수 있을까? 적어도 상대를 향한 자신의 호감 표현에 그치는 고백과는 다르다. 물론 그것과 다르다는 점이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고통을 “입안에 밀어넣으”며 무작정 감내하는 시인이 사랑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그것에 저항한다면, 그 고통을 진솔하게 표현해 청자에게 고백하는 <별똥별>의 화자는 사랑의 불가항력에 무력하지만 아름답게 순응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무력하지만 아름다운 순응'을 생각하면 몇 편의 비슷한 영화와 그 주인공의 비극이 떠오른다. <타이타닉>의 잭이 얼어가는 물 속에서 살아남으라고 속삭인 이유도,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온종일 전화 앞에서 서성였던 이유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유도 저마다 빛은 다르지만 결국 본질은 같을 것이다. 그것은 “바보 같은 사랑”이 저지른 낭만이다. 그러므로 곡의 마지막에서 “stupid love song”이라고 반복하는 까닭은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폐허'를 전하는 이 곡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고백이 되리라는 비극적 결말을 알아서이다. 그럼에도 날 사랑해달라고 말하고야 마는 것, 이것도 바보 같은 사랑이 저지른 낭만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목도하고 기울어지는 지구를 감각하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도 <별똥별>을 들으면 나는 여전히 그리고 기꺼이 사랑에 빠지고 싶다. 세상에, 이런 사랑도 있다는 감탄이 할 수 있는 전부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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