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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현 Aug 12. 2021

식물의 자리를 옮길 때

식물의 이사 - 대은룡



아직 한여름이지만, 올해는 벌써 제가 가장 많은 수의 식물을 죽인 해가 되었습니다. 부모님 집수리 때문에 여기저기 쫓아다닌다고 집을 오랫동안 비워 두었기 때문입니다. 식물들 걱정이 되어, 특히 물을 많이 먹는 작년에 새로 들인 황칠나무가 신경 쓰여 자주 집에 온다고 애를 썼지만, 역시나 식물들은 기다려주지 않았죠.ㅠ 식물이 믿고 의지할 만한 안정적인 환경을 마련해주지 못한 저를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어쩌다 보니 거처를 여러 번 바꿔 살게 되면서 제가 집이 아닌 공간에 어떻게 적응하는지, 그리고 식물은 새로운 환경과 공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JeonghyunLee




저 못지않은 식물 똥손임을 자부하는 친구의 딸내미가 몇 해 전 방과 후 과학 시간에 식물을 받아왔답니다. 개운죽이었다고 해요. 딸의 식물을 죽일까 봐 애지중지한 덕분인지 의외로 개운죽은 잘 자랐는데, 얼마 후 친구 가족이 1년 동안 해외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정성껏 키운 개운죽과 딸이 친구처럼 생각하는 거북이가 문제였죠. 고심 끝에 믿을 만한 딸 친구의 집에 거북이와 함께 개운죽도 맡겼다고 해요.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다행히 거북이도 개운죽도 모두 건강하게 잘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온 후 원래 살던 곳이 아닌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된 친구 가족은, 1년 동안 잘 돌보아준 고마움의 표시로 거북이는 딸 친구에게 남겨 두기로 하고 개운죽은 새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주인에게 남겨진 거북이는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온 개운죽은 그 전과 똑같은 정성을 쏟았으나 새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해요. 




©JeonghyunLee




식물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고 모든 힘을 쏟았을 텐데, 제 친구의 집에서 다른 주인의 집으로 이사했을 때는 적응에 성공했으나, 일 년 뒤 다시 만난 주인과 다른 도시로의 이사는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죠. 식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장착하지 못한 친구나 저나 새로운 집에서 무엇이 잘 못 되어서 개운죽이 살아남지 못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바뀐 공간의 햇빛이나 습도 또는 그동안의 화분 속 상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가능하겠지만, 어쩌면 일 년 전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면서 적응하는 데에 모든 힘을 다 쏟았다가 1년 후 또 한 번 그만큼의 힘을 쏟기에는 힘들었을 수도 있죠. 이로써 또 한 번 식물과의 이별을 경험한 친구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거북이와 함께 그 집에 놔두고 올 걸 그랬다며 마음 아파했지만, 식물 초보들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저에게 그때의 개운죽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아픔은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JeonghyunLee



얼마 전 라디오에서 한 꼬마 아이가 봄이 와서 좋은 점으로, 학년이 바뀌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적잖이 놀랐었습니다. 새로 만나는 친구들이 어떤 애들 일지, 그 애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게 기대된다고 하다니 정말 엄청난 긍정의 에너지다 싶었습니다. 저도 분명히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매 해마다 새로운 반으로 배정이 되어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고 어떻게든 적응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렵고 힘든 일을 어떻게 해냈나 싶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환경, 일, 사람에 대해서는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큽니다. 어린 시절에는 저도 새로운 반 친구들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콩닥대던 기억이 있으니 확실히 나이가 들면서 심약해졌나 봅니다. 




©JeonghyunLee




자신을 지탱하는 흙에 뿌리를 내려 꼭 붙들고 사는 식물들도 새로운 환경으로의 변화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식물은 자신에게 맞는 환경을 찾아 스스로 이동하지 못하는 대신 그 힘을 지금 있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쏟아붓죠. 식물이 이해할 수 있는 신호를 서서히 보내면서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에는 누구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식물이지만, 인간의 결정에 따라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환경의 변화는 식물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화분을 갈아줄 때는 물론이고, 식물의 위치를 이동할 때도 신중해야 합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식물이라고 해서 그늘에 있던 식물을 볕 좋은 날 갑자기 따가운 직사광선 아래 장시간 놓는다거나 날씨가 추워졌다고 야외에 있던 식물을 불쑥 빛이 잘 안 드는 따뜻한 방 안으로 옮겨 놓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죠. 이사를 하거나 직장이나 학교를 옮기면 사람도 한동안 적응하는 기간을 가져야 하고 그동안은 아무래도 예전만큼 편안하지 않은 것처럼 식물에게도 충분한 적응 기간을 주고 유심히 지켜봐 주는 것이 좋습니다. 식물을 가져올 때 항상 식물이 원래 있던 곳의 환경을 기억하라는 말도 그래서 하는 것 같습니다. 식물의 원산지만큼이나 농장이나 꽃집, 다른 사람의 집 등 식물이 그전에 실제로 자라고 있던 곳의 환경을 고려해서 지금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아무래도 적응하기 더 쉬울 테니까요. 




©JeonghyunLee



정해진 장소에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는 식물의 마음을 최대한 헤아려 주고 싶습니다. 그 변화가 식물이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것이면, 사진 속 대은룡처럼 계절과 세월이 변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적응하여 시간마다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식물입니다. 원하는 만큼 충분히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얼마든지 고민해보고 원하는 만큼만 변해도 되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더 튼튼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 그런 변화들을 식물과 함께 천천히 겪어 가고 싶습니다. 




©JeonghyunLee






<대은룡 키우기>


마디마다 지그재그로 꺾이는 줄기 때문인지 ‘천국의 계단’, ‘악마의 등뼈’, ‘야곱의 사다리’ 등 엄청난 이름들로도 불려요. 어쩐지 대은룡의 이 마디마디가 세월의 흐름을 단단히 이겨낸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빛을 충분히 받고 찬바람 불어오는 가을을 맞으면 잎 테두리부터 분홍색으로 물이 듭니다. 원래는 잎이 많이 달리지만, 겨울에는 잎을 떨구고 봄이 되면 다시 새 잎이 돋아요. 잎이 풍성할 때만큼이나 잎이 다 떨어지고 줄기만 남은 모습도 멋있어서 일 년 내내 변하는 모습을 감상하기 좋아요.


빛 : 빛이 잘 드는 반양지에서 키워주시고 직사광선은 피해 주세요.


물 : 다육식물이니 건조하게 키워주세요. 흙이 완전히 말랐거나 잎이 돌돌 말렸을 때 흠뻑 주시면 돼요.


온도 : 일교차를 크게 해 주시면 붉은 물이 잘 들어요. 겨울에도 따뜻하게 키워주세요.





제가 찍은 식물 사진과 식물에 대해 쓴 글을 묶은 책 '식물 사진관'이 출간되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1885704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교보문고 등등에서 구매하실 수 있어요.


제가 찍는 식물 사진과 사진으로 만든 포스터는 이곳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instagram.com/40plants/


제가 찍는 다른 사진들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어요.

https://www.instagram.com/jhl.photo/




©Jeonghyun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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