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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쉐이크 Oct 02. 2022

유럽

 94년 여름방학은 오스트리아에서 보냈다. 국민학교 1학년생이던 내가 한 달여를 보낸 곳은 그라츠라는 도시로, 비엔나에서 남쪽으로 차를 타고 2~3시간쯤 걸리는 도시이다. 어릴 땐 시골이라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커서 찾아보니 대학도 많고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규모도 큰 도시라고 한다.


 그때만 해도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 해 여름 해외여행을 갔다 온 사람은 우리 학년에 말레이시아인지 싱가포르인지를 갔다 왔다는 여학생 한 명과 나, 그렇게 2명이었다(그렇다, 이때는 바다 건너 여행을 다녀왔다 하면 전교에 소문이 돌던 때였다).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게 89년도부터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나는 루프트한자를 타고 독일 (아마 뮌헨이었지 않았을까) 어느 공항에서 환승을 해서 오스트리아로 들어갔었는데, 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면 들어보지도 못한 오스트리아 보다는 독일에 관심을 더 가졌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독일은 우리들에게 아주 나쁜 나라였다. 적어도 우리 반에서는 그랬다. 나치 독일이나 공산국가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긴 한데, 당최 8살 먹은 아이들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독일을 그렇게 미워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튼 친구들은 나를 둘러싸고는 독일 사람들이랑 인사를 했냐는 둥 취조를 하다가 내가 독일 사람들과 악수는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나의 결백을 인정해 주었다. 도대체 그날의 우리에게 독일인과 악수는 무슨 의미였을까.


 그런 때였으니, 유럽에서 내가 본 모든 게 새로웠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낯선 음식들 (처음 먹었던 맛이 잊히지 않는 음식들: 살라미와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한국과는 맛이 다른 식사용 빵들, 이태리에서 먹었던 젤라토, 그리고 젤라토. 또 젤라토)과 식당에서 물을 돈을 내고 사 먹어야 한다는 충격적인 사실, 길거리에서 키스를 하는 커플들 (이건 정말이지 말 그대로 문화충격이었다) 따위가 그랬다.


 오스트리아에서 나에게 놀라움을 줬던 것 중 하나는 자전거 전용도로였는데, 그때만 해도 자전거 도로라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무언가였다. 자전거 도로와,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와, 자전거 도로 위에 그려진 횡단보도를 보면서 여긴 우리나라보다 좋고 세련된 곳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94년의 유럽은 그렇게나 모든 게 선진적인 곳이었다.




 유럽을 다시 찾은 건 06년도 여름이었다. 여행 계획은 여름방학 직전에야 급하게 세워졌는데, 1학기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난 날 친구가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고, 미국을 가겠다는 친구와 호주엘 가겠다는 내가 중간지점인 유럽으로 극적인 합의를 본 게 여행 계획의 거의 전부였다. 그냥 그렇게 여행 책자 한 권을 달랑 들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기억 속 06년은 스타벅스를 위시한 카페 문화가 한국에 막 대중화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스타벅스에 가서 톨, 그란데 사이즈 따위를 못 알아들어 주문을 못한다는 이야기가 유머로 소비되던 때였다.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일종이라는 게 지금처럼 상식이 되기도 전이었고, 내가 먹어본 고급진 음식이라고 해봐야 캘리포니아 롤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먹은 함박스테이크 정도인 그런 때였다. 그러니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반년쯤 대학생활을 한 내가 세련된 서양 음식들을 알았을 리 만무했다. 영국의 피시 앤 칩스도, 스위스의 퐁듀도, 이탈리아에선 제대로 된 파스타도 한 번 먹어보지 않고 19박 7개국 유럽 여행을 마쳤다. 대신 1.5유로쯤 하는 참치 샌드위치(좀 짰다)랑 길거리 피자를 참 많이도 먹었다.


 못 먹고 돌아다닌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고, 그렇게나 촌스러웠던 시절에 다시 찾은 유럽은 여전히 새롭고 멋졌다. 젤라토는 여전히 맛이 기가 막혔고, 이국적인 냄새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가득했다. 에펠탑 근처 어딘가에는 큰 터치패널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름을 적으면 인쇄를 해줬던가 뭐 그런 광광객을 위한 뭔가 였던 것 같다) 그것마저 새롭고 신기했다. 유럽은 내게 여전히 선진적인 곳이었다.



 세 번째 유럽 방문은 15년도였다. 영국 인 포르투갈 아웃 코스였고, 영국은 두 번째 방문이었다. 나이를 먹고 다시 찾은 유럽은 안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는 음식들, 아는 브랜드, 설계된 지 오래되어 불편한 도로, 낡은 건물들과 엘리베이터, 카드도 안 되는 시내버스. 예전과 달리 식당에서도 척척이다. 06년도에 런던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볼 때는 우와! 했지만, 15년도에 본 라이온 킹은 놀랍지 않았다.


 내가 나이를 먹은 탓도 있다. 유럽을 세 번이나 가본 탓도 물론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많이 변한 탓이다. 세 번째로 유럽을 방문했을 때 나는 우리나라가 많이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물론 이국의 풍경은 여전히 낯설고 좋았지만 그뿐이었다. 내 마음속 유럽은 닿을 수 없는 앞선 나라들이었는데,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어쩐지 섭섭했다.



 코로나 시국을 거쳐, 2022년에 떠올리는 유럽은 어쩐지 낡은 이미지다. 우리보다 앞서고 문명화된 유럽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없다. 예쁜 가게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음악과 영화들. 그런 것들은 이제 우리도 많다. 우리나라 커플들도 길거리에서 키스를 하고, 이태리 젤라토도 서울 어디쯤에 가면 사 먹을 수 있다. 나라가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뿌듯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다.


 다음 달에 다시 유럽에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대강 10년마다 한 번씩 유럽엘 가는 셈이다. 이번 행선지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다. 도시는 별 재미가 없으니 아예 테마를 자연으로 잡고 알프스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다. 이번에는 어떤 느낌을 받을지 사뭇 궁금하다.


 사족 같은 이야기. 비슷한 감정을 일본을 떠올릴 때도 느낀다. 일본제 물건은 고급의 상징과 같았고, X-Japan을 들으면서 일본에서 유행하는 샤기컷을 따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일본을 생각하면 구태와 약간의 답답함과 촌스러움, 싼 물가와 고집스러운 아날로그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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