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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쉐이크 Jun 06. 2022

우리는 지금을 살아간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친구와 단둘이 별다른 계획 없이 무작정 유럽으로 떠났다. 로마에서 우리는 흩어지기로 했는데, 나는 피렌체로 친구는 아시시를 갔다가 저녁에 다시 로마 중앙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구를 먼저 기차에 태워 보내고 가방을 보니 물통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나는 저쪽 구석에 앉아 짐들을 꺼내 정리했다. 그때 외국인이 말을 걸었고, 한눈을 파는 사이에 꺼내놓은 짐들을 도둑맞았다. 카메라와 여태까지 찍은 사진들을 저장해 둔 PMP가 없어졌다. 


 로마는 그해 여름 유럽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였다. 짐들을 도둑맞은 건 한국으로 출발하기 이틀쯤 전이었을 거다. 그래서 나는 그 한 달 남짓한 여행의 사진이 없다. 같이 간 친구의 사진들도 내 PMP에 백업해 뒀으므로, 역시 없다.


 처음에는 내 여행 기록이 모두 사라져 큰일이 난 것만 같았는데, 이제와 생각을 해보면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행 사진을 뒤적이고 싶은 날도 별로 없었으므로, 사진이 없어서 아쉬웠던 적도 생각 외로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여행의 감정과 낯선 냄새들. 잔뜩 겁에 질려 있었던 외국에서의 밤거리 같은 기억들은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제 와서 아쉬운 건, 왜 더 자세히 관찰하고 더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분명 거기서만 해볼 수 있는 사색과 경험이 있었을 텐데 그걸 더 해보지 못했을까. 같은 것들이다. 그 시절을 추억할 사진은 아니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내가 지금을 살아간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켜켜이 쌓인 내 순간들이 나를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지금을 관찰하고 지금을 사색해야 한다. 흘러가는 현재를 풍성하게 음미해야만 한다.


 굳이 기억하려 할 필요는 없다. 그 순간 했던 생각들은 이미 나를 변화시킨다. 비록 내가 보았던 건물들의 모양과 그림들, 길거리의 모습들은 이제 쉬이 떠오르지 않지만 낯선 문화에서 오는 이질감과 다양성에 대한 생각들은 분명 내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해 기억을 붙들어 매려고 사진에 목멜 필요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지금을 살고 있고, 지금을 사색해야 한다.


 사족. 다른 이야기인데, 얼마 전부터 여행에 가서 사진을 찍는 대신 노트에 내가 본 것들을 스케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진보다는 아무래도 더 대상에 집중하고 순간에 몰입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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