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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란 무엇인가?

이동휘의 '예술 이론의 순환성'에 부쳐

멜러의 "분석 철학"에 관한 글이 몇몇 동료들 사이에서 화두가 되었다. 멜러는 이 글에서 철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말하면서, '좋은 철학은 언제나 분석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때 '분석적'이라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멜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적 분석이란, 내가 제시한 사소한 예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지적인 스프링쿨러 시스템으로, 세계를 보는 우리의 관점을 흐리게 만드는 개념적 먼지들을 가라앉히는 기능을 한다. 루이스 캐럴의 ‘아무도’에 관한 작은 수수께끼에서처럼, 비상식이 만들어내는 가짜 신비함을 탐지하고 해소함으로써 세계의 진정한 수수께끼가 더 분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바라건대, 그 진정한 수수께끼가 더 잘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실로 철학적 분석의 주요한 목적이다."


나는 멜러의 이 글을 번역했을 뿐이지만, 다름아닌 이 글을 굳이 번역해 공개한 것은 당연히 이 글의 기조와 내용에 대해 나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그리고 더 명민하게!) 보는 학문적 동료가 있다는 일은 매우 운이 좋은 일이다. 이동휘는 '예술 이론의 순환성'에서 멜러의 이러한 비유로 대표되는 분석 철학, 그리고 분석 미학의 기조가 사실 성취될 수 없는 목표이며 "모종의 이론적 결벽성"을 보인다고 언급한다.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려고 한다는 것은 분석철학과 분석미학 바깥의 연구자들이 분석미학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일 뿐 아니라 사실 분석미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 스스로도 때로 느끼는 회의감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어떤 분석미학 연구자는 분석미학을 하다 보면 '그래서 결국 뭐가 남는가?'라는 회의에 빠지곤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이동휘의 글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의 글은 분석미학에 대한 이러한 생각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는 예술 자체가, (정련되고 공식화된) 이론으로 포착될 수 없는 대상이라고 여기는 듯 하다. 그에 따르면 "예술 제도는 현저히 담론적"이며, "어떤(모든?) 예술 이론은 예술 제도에 관한 개별 측면들의 '먼지'를 닦아내는 일 즉 예술 제도의 해석에 번번이 실패"한다.

(여기서 이동휘가 사용하는 '예술 제도'라는 용어는 아마 디키의 의미에서의, 즉 테크니컬한 의미에서의 '제도'라기보다는, 예술 전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이 담론적이라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예술은 '예술 제도'일 것이다.)


여기서 '예술 제도가 담론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동휘는 우리가 가지는 실제 예술 사태들, 즉 예술 현상들은 예술 이론에 의존적이거나, 적어도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한다. 왜냐하면 예술 현상들을 '예술'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개념에 대한 어떤 이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 이론이 성립하려면 그것은 이미 어떤 개념화를 거쳐 '예술'이라는 이론적 범주에 들어오는 사태들을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술 이론은 순환적이다. 이동휘는 이를 가리켜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부른다(이동휘에 따르면 이것은 하버마스의 개념이다.). 만일 예술 이론이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면, 예술 이론이 그 대상인 예술 현상들로부터 '먼지'를 닦아내고, 예술 현상의 복잡성을 제거할 수 있다는 희망은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 이론이 '예술' 현상을 대상으로 삼는 순간, 예술 이론은 순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물음은 이것이다. 예술 이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임수영이 잘 지적했듯, 분석미학의 전통에는 이미 예술 이론의 역할을 의심하는 중요한 논문이 있다. 모리스 웨이츠(Morris Weitz)의 "The Role of Theory in Aesthetics"(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1956)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웨이츠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임수영이 그 작업을 하고 있으며, 나는 웨이츠가 이 논문에서 '예술 이론'을 '예술 정의'와 동의어로 사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동휘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술 정의에 국한되지는 않았으므로, 웨이츠에 대한 언급은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임수영의 글은 아직 완성되어 공개되지 않았다. 공개되는 대로 링크를 달 예정임)


예술 이론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예술 이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술철학과 미학 연구자라면 마음 속에 모두 깊이 품고 있을 의문이리라. 따라서 내가 이 물음에 대해서 단박에 훌륭한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예술 이론의 효용을 설명하는 일은 자칫하면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라는 자기어필이 되거나, 아니면 예술 이론이 얼마나 인류의 지성사에 기여하는지에 대한 (아무도 안 듣는ㅠㅠ) 웅변이 되어버리기 쉬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작은 차원에서 물어보려고 한다. 멜러에 따르면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지적인 스프링쿨러 시스템"으로, "우리의 관점을 흐리게 만드는 개념적 먼지들을 가라앉히는" 일이다. 이동휘는 이 비유가, 언젠가는 어떤 형태의 예술 이론이 등장하여 예술 현상의 '먼지'를 닦아내 그것을 '깨끗하게 건져내' 주리라는 소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두 사람의 생각을 비교해 보면, 문제는 결국 '먼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 가능하다는 건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건가? 가능하더라도 먼지 닦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건가? 나는 멜러가 말하는 '개념적 먼지'가 무엇인지, 나의 관점에서 더 설명함으로써 이동휘의 비판에 맞서 보려고 하며, 여전히 예술 이론이 "먼지를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하다고 말하고자 한다.


먼지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멜러가 말하는 '우리의 관점을 흐리게 만드는 개념적 먼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다음 대화를 보자.


A: 유명한 예술가라면 똥을 싸도 예술이 되는 것 같아. 뒤샹을 봐.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놨을 뿐인데 변기가 예술이 되었잖아.
B: 그럴 수도 있지. 난 세상 모든 게 다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난 가끔 날씨가 좋은 날 하늘을 보면서 '날씨가 예술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하는걸.  


A와 B의 대화는 개념적으로 명료한 대화인가? 겉보기에는 아주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대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A가 사용하는 '예술이다'라는 진술의 의미와, B가 사용하는 '예술이다'라는 진술의 의미는 사실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뒤샹의 <샘>을 가리켜 "이 변기는 예술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날씨가 아주 좋은 날 하늘을 보며 "오늘 날씨가 예술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변기'와 '날씨'를 둘 다 포함시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발화들로부터 '예술'이라는 말이 때로는 분류적인 의미(어떤 대상이 '예술'이라는 범주에 포함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평가적인 의미(어떤 대상의 질이 높음을 칭찬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겉보기에는 '예술이다'라는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을 수 있겠지만,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뒤샹의 변기와 날씨를 동일한 범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예술'이라는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위처럼 구분한 것은 (내가 알기로는) 분석미학자 조지 디키(George Dickie)이다. 디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 이론의 대상에 있어서 나는 "예술" 혹은 "예술작품"이라는 용어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두 가지 의미란 분류적 의미와 평가적 의미이다. 분류적 의미는 어떤 대상이 예술 작품으로서 분류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러나, 무언가를 예술 작품으로서 분류하는 일은, 그것이 '좋은' 예술작품임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어떤 동물이 말(horse)로 올바르게 분류된다는 사실은 그 동물이 좋은 말임을 보증해주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나 때로 "예술작품"이라는 말은 무언가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어떤 그림이나 폭포에 대해서 그것이 예술작품이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칭찬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예술작품이야"라는 말이 분류가 아니라 평가라는 것은 알기 쉬운데, 왜냐하면 문장을 시작하는 두 단어('이 그림') 자체가 이미, 이 진술이 지칭하는 대상이 예술작품으로서 분류된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두 의미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George Dickie, Aesthetics:An Introduction(1971), p.43)


나는 예술 현상(즉, 실제 예술 작품들이나, 예술작품에 관련된 여러 발화들, 관습들)이 복잡하고, 때로 이론 의존적이며, 이론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일이 불가능하리라는 데에는 이동휘와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예술 이론이 원천적으로 해석학적 순환에 빠지며, 예술 이론이 '먼지를 가라앉히는 일'을 하려는 것이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는 예술 이론이 가라앉히려는 '먼지'가 무엇이냐를 더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예술 이론이 겨냥하는 먼지는 예술 현상, 혹은 사태 자체의 먼지가 아니라, 사태를 보는 우리의 관점을 흐리게 만드는 먼지이다. 나는 위 인용에서 디키가 하는 일이 바로 예술 이론이 하려는 '먼지를 가라앉히는 일'의 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사태만을 있는 그대로 보면, 이 사태는 매우 신비해 보인다. 즉 변기와 날씨가 동일하게 예술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변기와 날씨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이 사태를 신비한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먼지에 의해 관점이 흐려진 사람인 셈이다. 이 사태를 기술하고 바라보는 방식에는 정리가 필요하다. 즉, 이들이 '예술'이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을 통해, 이 사태가 정말로 중요하고 심오한 넌센스를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를 먼저 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디키는 "예술"의 두 의미를 구별함으로써 이 사태가 신비하고 심오한 사태가 아님을 밝혀냈다.  


디키의 이런 작업은 멜러가 철학적 분석에 대해 했던 언급과 맞닿아 있다. 다시 한번 인용하자면, 멜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이 비상식적 사실들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왜 그것이 비상식인지 말하는 일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도’에 관한 농담 같은 것들로부터 적절하게 즐거움을 느껴야 하며, 그런 농담들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것과, 그 농담이 중요한 것인 척 구는 것을 구분해야만 한다."


철학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태에 대해 그것이 '중요한 것인 척' 구는 일이다. 분석적 예술 이론이 가라앉히려는 먼지는 사태의 복잡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태의 복잡성을 불필요하게 신비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의 불명료성이다. 나는 예술 현상 자체가 복잡하고 유동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현상의 복잡성과 유동성에 지나치게 취하면 결국 예술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먼지'를 예술 현상 자체에 붙은 것이 아니라 예술 현상을 이해하려는 관점에 붙은 것으로 본다면, '찬물을 끼얹'더라도 먼지를 가라앉혀 사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려는 분석적 예술 이론의 기획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나의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나의 박사학위 프로젝트는 '가상적인 것(the virtual)'을 이론화하는 일이다. 학위논문을 만들어 가면서 스스로 이론화라는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감에 끊임없이 시달렸는데, 그럴 때마다 나에게 용기를 준, 내가 좋아하는 책의 한 부분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마도 어떤 문학작품이나 에세이의 "너는 잘 할 수 있어"류의 문장이리라고 생각하겠지만... 미친 인문대생은 그런 것에는 더이상 감동받지 않는다... 내 노트북 앞에 붙어 있는, 내가 회의에 빠질 때마다 보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What is of concern is the fact that we cannot easily say why something does or does not count as representational or why it is borderline, or what one would have to learn about it to decide. (...) we are not just uncertain about what is representational, we are confused. We need a theory.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이 왜 재현적이라고 혹은 재현적이지 않다고 간주되는지, 또는 왜 그것이 재현과 재현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상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 우리는 무엇이 재현적인지에 대해 단순히 확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론이 필요하다." (Kendall Walton, Mimesis as Make-Believe)


위 문장은 어떤 경구는 아니고, 켄달 월튼이라는 분석미학자가 허구(fiction) 혹은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이론을 펼친 Mimesis as Make-Believe라는 책(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요는, 우리는 재현이 무엇인지 모르고, 더 나아가서 재현이 무엇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재현에 대한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분석적 미학이 하려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함에 있어서 혼란스럽다면, 그 혼란을 극복할 만한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 때의 '무언가'가 그 자체로 이미 복잡하고 유동적인 예술 현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이동휘 선생이 이 글에 대한 또 한 편의 훌륭한 리스폰스를 보내 주었다. 

"먼지가 뭔지: 이다민의 '먼지란 무엇인가'에 또 부쳐"

"디키는 예술가에게 칭찬을 해본 적이 없음이 분명하다." ㅋㅋㅋ 디키는 좀 쪼잔한 사람이었을까?

사실 나는 이 글에서 예술작품이 해석적 순환을 품고 있다는 이동휘의 주장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코멘트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글을 쓸 때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음). 이동휘는 이 지점을 잘 지적해 주었다. 


"먼지가 뭔지"를 보고 내가 아직 생각하고 있는 물음은 이 두 가지이다.

- 예술작품이 예술이론과 정말로 순환적인 관계에 있는 것일까? 

- 이동휘가 말하는 '예술이론'이 내가 염두에 두는 '예술이론'과 정말로 같은 의미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사이에는 진정한 불일치가 없는 셈이다) 

빠른 시일 내에 이 두 물음에 대한 잠정적인 답을 내릴 수 있기를 스스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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