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가 자신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는 이유.
취업의 문턱이 좁아진 현실은 역설적으로 젊은이들의 가방끈을 늘린다.
전통적 의미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취업을 통한 사회적 진출과 결혼을 통한 물리적 자립을 뜻했는데, 높아진 취업의 문턱은 연령적으로 성인이어야 할 많은 젊은이들을 여전히 청소년으로 가두어 놓고 있다.
상승하는 대학원 진학률은 이것의 반증일까?
그래서 대학원생은 참 딱하다.
대학원 진학은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취업을 위한 도구로 스펙을 쌓고자 하여 진학하는 대학원과, 학자의 길을 위한 대학원으로의 진학.
전자는 전자대로 괴롭다. 본디 대학원으로의 진학은 '학문의 세계로 입문'과 동일하기에 대학생 때와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다른 학습량 폭탄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논문은 어떤가. 꾸역꾸역 넘겼던 코스웍(Course work) 뒤에는 논문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것은 이 어려운 과정이 단지 2년(더 걸릴 수도 있겠지만)만의 고통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후자는 후자대로 괴롭다. 전자와 똑같은 무게의 고통을 견디지만, 앞으로의 미래가 지금과 별 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어려운 거인의 앞에서 10cm 남짓의 펜을 들고 덤비는 꼴이라니. '거인을 정복하는 것은 너희의 몫이다!' 라고 외치는 지도교수의 말이 야속하기만 하다.
대학원생의 정체성은 참으로 모호하다. '대학원생'이라는 위치는 분명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갈등이 너무나 치열하다. 누구는 취업해서 얼마를 번다더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충분히 또래들의 사회로의 진출이 부럽게만 느껴진다. 그러다보면, 내가 지금 하는 공부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라는 회의감도 든다.
대학의 경영진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진리 탐구'라는 대학, 혹은 학자의 최종 목적이 그럼에도 우리들에게 전승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그럼 난? 이라는 물음으로 다시 되돌아 온다.
나는 왜 공부하는가?
이런 애매모호한 정체성 속에서도, 내적 갈등 속에서도 이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인 마음의 뿌리는 무엇일까?
살아가는 이유. 지금의 위치와 지금의 내 삶의 무게를 견디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 이것은 무엇일까?
쉽게 물을 수 있는 질문이지만, 깊이 있게 답을 내놓지 않았던 문제일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당장 답을 내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글을 쓰고, 그래서 책을 읽고, 그리고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