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는 가볍게, 머리는 무겁게
새로운 직장에 이직하고 난 후 처음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놀랍게도 일을 시작한 지 8개월 째였고 겨울과 봄이 이어지는 시기에 시작하여 가을과 겨울이 연결되는 시점에 와있었다. 출근 첫 주부터 야근이 시작되었고 굵직한 프로젝트가 연달아 이어지면서 때때로 주말에도 일을 했으며 수시로 핸드폰에 다운로드하여둔 아웃룩 앱을 클릭해 이메일 목록을 훑어가며 혹시 내가 놓친 업무는 없는지 잘못 전달된 내용은 없는지 확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였는지, 잘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담감이 최고조로 이른 수개월 동안은 새벽에 한 번 이상 의도치 않게 잠에서 깼고 나빠진 수면의 질을 매일 습관처럼 커피 두세 잔씩을 마셔가며 억지로 메꿔보고자 했다. 점심 식사는 항상 내 책상에서 밖에서 사 온 음식을 대충 입에 욱여넣으며 간단히 해결했고 쏟아지는 이메일과 업무를 처리하고 난 후의 퇴근길에는 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나를 튜브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려 집으로 이동시켜주길 바랐다.
2주간의 장기 휴가를 신청하고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휴가 전 마지막 근무일이었고 휴가를 가기 전에 마무리 짓고 싶었던 일과 인수인계를 위한 이메일 작성을 마치고 나니 밤 11시였다. 가방 속에 짐을 챙겼고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나서도 계속 일 생각이 났다.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한 직후, 혹시나 싶어 긴급한 요청이 있을까 싶어 업무용 이메일을 한번 확인했는데 자리를 비운 잠깐 사이에 쌓여있는 이메일에 놀라 바로 앱을 종료했다. 마음이 어쩐지 불편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마치 안 하고 온 것 같아서. 그게 어쩌면 나를 계속 괴롭혀온 본질이었을까.
사람에 따라 표현의 무게감은 상대적이겠지만 나에게 있어 '내 일'이라는 표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일이라는 것이 본디 한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과거에 마무리된 일을 생각해볼 때면 크건 작건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 지난주에 번역했던 어떤 기사의 제목은 A보다는 B가 더 적절했을 것 같고 이메일 카피는 신선한 표현이 더해졌다면 더욱 시선을 끌지 않았을까 하는 식이다. 지난 몇 개월간 입버릇처럼 말해온 '바쁘다'라는 상황을 돌이켜 봤을 때 - 물론 실제로 그랬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나 -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바쁘다'라는 틀에 갇혀 여유를 찾지 못했던 내가 그 중심에 있었다.
모든 일에는 중요도가 있다. 중요도를 매기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일이 몰아닥쳤을 때 그것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다 보면 무엇이 하루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인지 아니면 5분 만에 뚝딱 처리해도 무리 없을 일인지 구분 짓기 어렵다. 일을 '개수'의 단위로 처리해온 나의 업무 성적표는 그리 효율적이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업무의 연장선에 계속 머물다 보니 이러한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낭비라고 느껴졌다. 사실은 바쁠수록 내게 더욱 필요한 것이 '여유를 가지고 잠시나마 차분히 생각하는 시간'이었음을 아직도 직장생활 베테랑이 되기에 턱없이 부족한 나는 알지 못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열흘 간의 태국 여행은 나에게 여러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특히 업무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을 향한 나의 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혹시나 업무를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길이 될까 싶어 일부러 랩탑도 챙겨가지 않았고 아웃룩 앱은 실수로 한번 확인한 이후로는 아예 첫 화면이 아닌 마지막 화면에 옮겨 놓았다. 거기에 영국과는 전혀 다른 거리 풍경과 기후, 다른 시간대를 가진 나라에서의 '자발적 격리'는 효과를 발휘하여 점차 나의 어깨는 가벼워졌으며 그 대신 '나 자신'이 주요 키워드인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오늘이 내 휴가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부터 또다시 치열한 업무의 현장에서 마냥 여유로웠던 태국의 한 때를 그리워할게 분명할 테고 2주 전에 했던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나를 조만간 발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때는 잠시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큰 호흡을 한 뒤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일에 지나치게 구애받거나 부담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다시 발견한다면 나와 일과의 적절한 거리감이 필요한 시기를 또 맞이한 것일 테니. '나를 좀 더 봐달라는 일의 칭얼거림을 단호히 무시하기. 적절한 책임감과 프로의식은 갖되 지나치게 나 자신을 힘들게 만들지 말 것. 업무를 얼마나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지가 아닌 업무를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집중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