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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유 Mar 15. 2023

웃음이 우리를 구원할지도 몰라요

<아스파라거스 가지> by 에두아르 마네 

나는 유머에 몹시 집착한다. 뜻밖의 상황에서 재치있는 말로 다른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게 하는 사람들을 너무 좋아하다 못해 내심 존경할 정도이다.  


최근에 두고 두고 나를 웃음짓게 만들었던 농담은 한 유적지에 방문했을 때 듣게 되었다. 심각한 수준으로 퍼졌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인해 주차장에 들어서기 전에  차에 탄 채로 체온 검사를 해야했었다. 멀찍이 검사하는 분이 보이길래 차를 천천히 세우면서 창문을 내리며 팔뚝을 창밖으로 내미려고 했다. 그러자 체온검사 하는 아저씨가 팔을 크게 저으며 소리치셨다.


- 아니, 아니, 팔 안내셔도 돼요!

- 네?네? 그럼 어떻게...?


내가 당황해 하자 그 분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레이저 건처럼 생긴 측정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마치 스나이퍼처럼 내 이마를 조준하자, 띡- 소리와 함께 나오는 익숙한 멘트. '정상체온입니다.'


지난 몇년간 엄청나게 다양한 체온계들이 발명되어 지금이야 드론으로 체온을 측정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테지만, 당시만 해도 원거리 레이저 체온계는 신문물이었다. 와, 이제까지 이마에 바짝 대고 찍는거만 해봤는데 진짜 신기하네요...! 하며 놀라워하자 그 분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요즘은 그렇게 안하죠. 그건 6.25때나 하던 측정방식인데요.


코로나 시작된지가 언젠데 6.25는 또 뭐야, 생각하면서 뻘하게 웃음이 터져나와 버렸다. 별 것 아닌 흰 소리에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 버린 것이다. 생각할 수록 웃겨서 박수까지 치며 과도하게(?) 웃는 나를 보며 아저씨는 이제야 임무를 다 완수했다는 듯 씨익 웃고 뒷 차로 다가가셨다. 


코로나 유행 시기가 길어지며 사람을 만나 웃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해왔던 탓일까. 어딜가든 심각한 표정으로 체온을 측정하고 마음껏 함께 웃거나 이야기하기도 눈치보이던 날들이었다.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많이 통용되던 뻔한 농담이었겠지만, 내 굳은 마음을 풀어주던 그 농담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역사도 정사보다 야사가 훨씬 재미있는 것처럼, 예술에서도 작품 그 자체보다 뒷 이야기가 흥미로울 때가 많다. 마네가 그린 <아스파라거스 묶음> 작품에 숨은 뒷이야기는 그때 아저씨의 실없는 농담처럼 지금도 나를 슬몃 웃게 만든다. 


1880년 샤를 에프뤼시라는 프랑스의 평론가이자 미술품 수집가는 마네에게 정물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제안한 가격은 800프랑이었다. 마네는 탁자 위에 올려진 아스파라거스 한 묶음을 생생한 색채감을 담아 쓱쓱 그려냈다. 

<아스파라거스 묶음, 1880, 에두아르 마네>


마네 특유의 시원시원한 터치로 그려진 <아스파라거스 묶음>작품은 막 인상파의 화풍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샤를 에프뤼시를 아주 흡족하게 만들었다. 샤를 에프뤼시는 원래 합의했던 가격인 800프랑에 추가로 200을 더해 총 1000프랑을 마네에게 부쳤다. 멋진 작품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한 찬사와 감사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마네 또한 놀랍고 기뻤다. 단순히 감사의 회신 편지를 적는 대신에 마네는 좀 더 예술가 답고 재치있는 방식으로 그 마음을 전했다. 마네는 원래 작품보다 더 작은, A4용지 반 정도 되는 캔버스에 무언인가를 쓱쓱 그려 작은 메모와 함께 주문자에게 보냈다. 


작품의 제목은 <아스파라거스 하나>. 마네가 메모에 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의 아스파라거스 묶음에서 하나가 빠졌네요." 

이보다 더 귀여운 목적을 가진 작품이 또 있을까.


딱히 고통스럽지도, 심각하게 우울하지도 않지만 어쩐지 회색빛의 나날이 어어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나날들에 언제나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이렇게 작은 농담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도도 없이, 그저 한 사람을 웃게 하기 위해서. 그 마음에 잠깐이라도 작은 꽃을 피우듯, 작은 숨구멍을 틔우기 위해서. 나 또한 내 주변인들과 생면부지의 사람들로부터 그런 날들의 균열을 깨주는 선물을 많이 받아왔던 것을 나는 생각한다. 


마네는 아스파라거스 작품을 그렸던 1880년부터 말년까지 자주 유머와 다정함이 깃든 작은 정물화를 그려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근대 회화의 포문을 열었다고 후대에 평가받는 마네가 이런 재치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 누구보다 명예에 목숨 걸었던 그가 아끼는 사람들의 작은 미소를 보기위해 이런 작품을 그렸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어쩐지 가슴이 몽글몽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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