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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유 Mar 02. 2023

벗겨진 신발의 의미

<No. 384, 3 September 2010> 데이비드 호크니

누군가 오랫동안 신은 신발이 가만히 놓여 있는 장면은 어쩐지 처량한 느낌이 든다. 군데 군데가 헤지고, 원래 색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만큼  바래고, 아무리 닦아도 더 이상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신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신발만으로는 신발 주인의 얼굴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신발을 신고 출퇴근하는 지하철에 터덜터덜 걸어가 고된 몸을 싣기도 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오랜 시간 기다리기도 했을 것이다.  


신발의 주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삶을 살아내려 애쓰는 동안 그의 신발은 그 인생을 내내 묵묵히 받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된 신발은 세상의 수없이 많은 물건들 중 하나인데도, 어쩐지 가슴 한 편을 애잔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듯 하다.  


<신발> 빈센트 반 고흐, 1888, Metropolitan Museum of Art


사람들이 고흐의 신발 작품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고흐는 그의 고달펐던 삶과는 상반되는 밝고 화사한 색채의 작품으로 사랑받는다.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 중에서는 흐릿한 색채의 정물화들도 꽤 있는데, 이러한 그의 작품들 중에 유독 마음을 끄는 것은 바로 이 신발 작품이다.  


신발은 한 사람의 무게를 온전히 지탱하는 물건이다. 인간의 존재에 깊은 애정을 품었지만 잘 어우러져 지내는데에는 몹시 서툴렀던 고흐. 그가 먼 발치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 조용한 존경과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어쩌면 그들의 생이 담긴 낡은 신발을 그리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발에 대한 나의 가장 강렬한 단상은 오래 전 전해 들었던 한 이야기로 남아있다. 대학 졸업 후 첫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니까 15년은 족히 넘은 이야기이다. 어느 날 친한 회사 동기가 자기 어머니의 친구 분인  A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A아주머니는 찢어지게 집안이 가난했던 남편과 어린 나이에 만났다. 아주머니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심성이 곧고 씩씩한 남자가 믿음직스러웠다고 한다. 두 분은 결혼을 했고 아주머니의 성심어린 내조를 받아 남편은 사업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아이들이 잘 자라 성인이 되었을 무렵 남편은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큰 마트 몇 개를 가진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함께 열심히 노력하고 힘을 더해 고비를 넘겨온 날들은 두 부부를 단단히 묶어주었다. 이제 삶에 더 바랄 건 없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평안한 노년 생활이 흐르던 중 아주머니는 친구들과 조금 긴 여행길에 올랐다. 이상한 촉 때문이었을까. 예정보다 며칠 빨리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를 현관에서 맞이한 것은 너무나 뜻밖의 물건이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남편의 낡은 신발 옆에, 아담한 여자 구두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발이 좀 큰 편이었던 아주머니의 신발일 리가 절대 없는, 그녀의 나이대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고 예쁜 구두.  아주머니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지셨고 자신의 생을 뒤틀어버린 고통스러운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로 병원에서 깨어나셨다고 한다. 이 서글픈 사건의 뒷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No. 384, 3 September 2010> 데이비드 호크니, 2010,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이 작품을 보며 오래 전 들었던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나란히 벗겨진 두 개의 남자 구두.  '살아 있는 현대미술의 전설’, ‘가장 영향력 있고 인기 있는 예술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라는 수식어를 가진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이다. 


아이패드로 쓱쓱 그린 작품이지만 호크니 작품만의 통통 튀는 색감은 그대로 살아있다. 주인들이 신발을 벗어던지며 집으로 들어가버린 후, 두 신발은 서로에게 기대어 편히 쉬고 있다. 


신발을 집의 현관에 나란히 벗어놓는 다는 것, 참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일이 그렇게도 내밀한 관계의 표상일 수 있음을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처음 깨달았던 것이다. 어쩌면 아주머니께 그건 단순한 신발 두 켤레가 아니라, 가장 사랑하고 믿고 의지했던 인생의 반쪽 옆에 다른 인생이 겹쳐 있는 모습은 아니었을지.


자신의 동성 연인과 지인 동성 커플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긴 호크니가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렸을지는 모를 일이나, 나에게 언제나 이 구두 작품은  함께 집에서 신발을 벗어놓을 수 있는 '관계'의 또다른 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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