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가와무라 미술관-1 / 시작부터 한 대 맞은 기분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아침 9시 45분 출발예정인 비행기를 타려 새벽 6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새벽 5시에 무심하게 와 있는 문자. '출발이 50분 지연됩니다.' 전날 미리 알려줬으면 좀 더 잘 수 있었잖아... 살짝 원망스럽지만 조금 여유 있게 준비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대기 중에 현장에서 다시 이루어진 40분의 지연.
결국 출발 시간만 2시간 가까이 지연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왜냐하면 도착하자마자 당장 가야 할 미술관이 있었고, 오늘 가지 못한다면 중간에 도저히 다시 끼워 넣을만한 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 때문에 굳이 안 해도 될 차 렌트까지 했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갈 예정이었던 DIC가와무라 미술관은 도쿄 중심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 정도가 걸리는 한적한 소도시에 위치한 미술관이다. 뷰가 끝내주는 퀄리티 좋은 레스토랑과, 예쁜 화과자와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원래의 계획은 도착하자마자 렌터카로 미술관으로 이동해, 레스토랑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코스요리를 맛보고, 배부르고 등따신(?) 만족스런 기분으로 미술관의 작품들을 여유 있게 감상한 뒤, 당이 떨어질 때쯤 다실에서 화과자와 차를 음미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미술관의 종료 시간은 5시. 그나마 다행힌 점은 나리타 공항에서 DIC가와무라 미술관까지 자동차로 20여 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가자! 점심만 패스하면 그래도 미술관을 보는 데는 문제가 없어!' 하며 씩씩하게 렌터카 업체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런 때야말로 머피의 법칙이 발동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기 마련이다. 렌터카 버스에서 우린 하필 마지막으로 내렸고, 그래서 접수 순서가 맨 뒤로 밀렸고,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리에게 배정된 직원 분은 하필 그 많은 직원분들 중에 유일하게 영어를 하지 못하는 분이셨다. 그래서 결국 렌터카를 다 빌리고 나니 3시 30분.
부리나케 차를 몰아 미술관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였다. 참, 이번에 방문한 일본 미술관들 중에 5시에 종료하는 곳이 꽤 많았다. 그래서 우리나라 미술관들처럼 9시-6시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가 전시를 아쉽게 짧게만 둘러보고 올 수도 있으니 참고해야 할 듯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종료 1시간 전에 입장 마감을 할까 봐 너무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종료 30분 전에 입장마감이어서 입장을 할 수 있었던 것...!
황금 같은 1시간이 남았다. 그 안에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야 한다. 비장한 표정으로 표를 끊고 재빨리 입구로 걸어갔다. 그런데 보통의 미술관 입구가 아니다. 미술관 건물은 보이지 않고, 웬 울창한 나무숲 앞에 매표소가 있었다. 숲에 가려 미술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매표소 옆에 무성한 풀숲으로 난 좁은 오솔길이 바로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인 것이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걸어갈수록 나무들이 조금씩 걷어지며 뒤편으로 너른 공간이 보인다. 그리고 길 끝에는 확 트인 유럽의 정원 같은 공간과 아름다운 호수가 나를 맞이한다. 그리고 오른편에 아담하고 단단해 보이는, 사치스럽지 않은 취향의 귀족이 살았을 법한 성처럼 보이는 미술관이 보인다.
노을과 함께 사그라들기 바로 직전, 오후 4시의 금빛 태양빛이 호수 위로 부서지는 모습만으로도 방금 전까지 쫓기던 마음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풍경을 바라보며 산책만 하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외국인인 나는 이곳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기에, 아쉽지만 이 정도로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경보에 가까운 속도로 미술관을 향해 돌진했다.
안타깝게도 DIC 가와무라 미술관 안에서는 실내 모든 곳에서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도 미술관 도록을 바탕으로 작품들을 복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다른 미술관에 비해서 굉장히 쉬운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미술관이 섬세하게 제공하는 정보 때문이었다.
가와무라 미술관에 방문하기 전 사전 조사를 하며 인상 깊었던 점 하나도 바로 미술관 방문했을 때 현재 볼 수 있는 작품의 리스트를 꼼꼼히 안내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미술관에 방문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바로 작품을 '직접' 본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내가 방문했을 때 실제로 어떤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사전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주 큰 장점이었다.
또한 이외에도 사람들이 기대할만한 유명한 작품, 주요한 작품들은 따로 칼럼 수준의 깊이를 가진 글들을 모두 홈페이지에 올려놓아서 방문하기 전부터 기대가 컸었던 미술관 중 하나이기도 했다. 특히 자국어 홈페이지 내용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영문 페이지가 잘 관리되고 있는 듯해 보여 인상 깊기도 했다.
처음 들어간 미술관은 아주 아담한 로비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단정한 로비에 아주 작은 안내 데스크와 뮤지엄 샵이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전체 미술관의 구조를 파악했는데,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가능하면 1시간 내에 모두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밭은 걸음으로 첫 갤러리에 들어섰다.
첫 번째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역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눈에 둘러봐도 대단한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샤갈, 르누아르, 모네, 마티스, 마리 로랑생... 첫 방부터 이 정도 수준이라고...? 마치 '봤지? 우리 미술관은 시작부터 이 정도 수준이야~'라는 느낌의 자신감 넘치는 배치. 작품 하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작품들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다. '렘브란트! 렘브란트부터 찾아! 그것만 봐도 오늘 할 일은 다했다!' 하는 마음속 외침에 조급해져서 얼른 훑어보고 떠나려는 그 순간, 바로 렘브란트의 작품이 거기 있었다.
인생의 굴곡을 겪어가며 변화하는 자신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그려냈던, <그려진 자서전>의 예술가 렘브란트의 작품 속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