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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아줌마

<Happy Happy>, 최정화

by 미유

저는 이제 완연한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이라면 이 문장이 너무 서글퍼서 자판을 치다가 저도 모르게 조용히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때쯤 누가 길에서 저를 아줌마라고 지칭해 불렀다면, 아무리 쫄보인 저라도 그 분을 세모눈을 뜨고 바라보면서 묵언의 항의 레이저를 쏘았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이 문장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저는 이제 어디서고 저 자신을 아줌마로 지칭합니다. "아줌마가 그거 까는 거 도와줄까?" "엄마 잃어버렸어? 아줌마랑 같이 엄마 찾아볼까?" 이렇게요. 저를 처음 보는 아이 입장에서 저를 지칭할 때 '아줌마'만큼 푸근하고 아무렇지 않은 대명사가 없습니다.


'아줌마'라는 말은 참 이상합니다. 사전을 보면 '기혼 여성을 존중해서 부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는데 언젠가부터는 조금 더 안좋은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하철 아줌마', '마트 아줌마', '목소리 큰 아줌마' 같은 표현들이 떠돌면서 배려 없고 예의 없는 사람들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직접 아줌마가 되고 보니, 제 일이 되어 그런지 어쩐건지 오히려 멋진 아줌마분들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지하철에서 임산부인 저를 알아보고 저 멀리서부터 저를 불러다가 손을 끌어 자리를 양보해주신 것도 아줌마였고,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큰 소리로 떠드는 아이의 입을 급하게 막으며 혼내는 저에게 '아이고, 그 나이 때 애가 조용히 있으면 어디 아픈 거예요. 괜찮아요!' 라며 무안하지 않게 활짝 웃어주시는 분도 아줌마였습니다.


아줌마처럼 안 보이려고, 아줌마가 안 되려고 기를 썼는데 나이를 먹고 아이를 낳아 아줌마가 되고 보니 어느 순간 그게 그렇게 싫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줌마가 되어서 아이도 어르신도 서슴없이 먼저 말을 걸고 참견해서 도울 수 있게 되었고, 또 가끔 일어나는 마음 불편한 상황도 웃으면서 무던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어요. 조금 능글맞아졌다면, 그것도 맞는 말일거에요. 어쨌든 예전의 저라면 절대 못했을 일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돌봄'을 하게 되면서 저 스스로가 가장 많이 변화했다고 느껴집니다. 오직 나를 위해서만, 나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서만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왔는데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밥을 차리고 하기 싫은 집안일도 꾸역꾸역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나의 아이를 넘어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아줌마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방식의 생명력과 활기를 가지게 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느껴집니다. 분명히 예전의 저 자신이었던 조각들이 저에게 남아있지만, 이제는 거기에 더 많은 일상의 경험들과 넉살이 켜켜이 쌓아올려지면서 새로운 제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더 너그러워졌고, 더 밝아졌으며, 더 편안해졌습니다.


그런데 한 작가님의 인터뷰를 읽다가 그 분의 생각이 저와 비슷해서 놀랐던 경험이 있어요. 바로 한국 현대미술작가인 최정화 작가님인데요. 작가님의 작품은 의외로 여러 곳에 있어서 '아 그게 최정화 작가님 작품이었어?'라고 놀라실 수도 있어요.


장밋빛 인생.png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들어가면 왼쪽편으로 꺾어서 서울시립미술관을 들어가게 되는데요, 그 길목에 설치된 거대한 꽃다발이 바로 최정화 작가님의 작품 <장미및 인생>입니다.


과일나무.png


또 국회 헌정 기념관 마당에 설치된 <상상의 과일나무>도 최정화 작가님의 작품이구요. 한번쯤은 보셨던 것 같지요?


happy happy.png


최정화 작가의 작품 <Happy Happy>입니다. 알록달록한 기둥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습니다. 마치 비디오 게임 속에서 등장하는 가상 공간처럼도 보이고, 혹은 아이들이 좋아하며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키즈카페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소재나 주제가작품은 사실 플라스틱 바구니들을 쌓아올려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최정화 작가님의 작품은 대부분 한눈에도 색상이 화려하고 크기도 커서 멀리서도 바로 눈에 띕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소재나 주제가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고, 또 익숙한 것들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바구니, 조화, 매일 쓰는 식기, 비닐, 잡화점에서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알록달록한 장식들을 사용한 작품이 많습니다.


플라스틱 바구니, 어쩌면 하얀 벽의 미술관과는 가장 거리가 먼 일상 그 자체인 공산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들'을 수집해서 그만의 방식으로 재조합하는 순간, 그것은 근사하고 쿨하며 때로는 웅장해 보이는 작품으로 변신합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지나치지 않고 모아서 쌓아올려 근사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일상을 살아내며 삶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요. 그리고 제게는 이것이 '아줌마 정신'처럼 느껴집니다.


최정화 작가님은 한 인터뷰에서 '아줌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작품의 스승은 아줌마입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아이디어를 시장에서 얻고, 가장 전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 어떤 예술가도 아줌마만 못합니다. 그 분들은 삶의 예술가에요.
'아줌마'는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하는 아름다운 단어에요."


사소한 것들을 지나치지 않는 마음. 매일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을 귀하게 쌓아올리는 힘.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들을 너그럽게 나누는 피어나는 무지개빛 포용. 생명을 자라게 하고 또 이어가도록 해주는 알록달록하고 행복한 삶의 기둥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순간들을 모아 힘차게 일구어 아름답게 쌓아올리는 그 과정이 어쩌면 예술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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