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한 풀스포가 들어있으니 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고 왔습니다. 배우들이 상당히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줘서 재밌게 볼 수 있었고, 내용도 곱씹어볼 만한 점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다양한 평들이 있는데 기독교적인 내용이나 이런 해석들은 제쳐두고 캐릭터별 '집'의 의미에 초점을 맞춰서 영화를 돌이켜 보겠습니다. 편의상 캐릭터 이름이 아닌 배우 이름을 활용하겠습니다.
[이병헌에게 집이란 꿈이다]
이병헌에게 집은 꿈입니다. 이병헌의 과거를 살펴보면, 이병헌은 빚쟁이에게 쫓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는 부동산 사기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902호를 찾아가죠. 돈을 받기 위해서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야기는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결국 902호 세입자를 죽이기에 이릅니다.
이병헌에게 집이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한 '꿈'을 실현시켜 줄 도구입니다. 이런 '꿈'을 망가뜨린 902호 세입자를 용서할 수 없었겠죠. 그렇게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902호 세입자로 둔갑하죠. 재밌는 건 이병헌이 902호의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신다는 겁니다. 거동이 불편한 (혹은 치매가 있는) 할머니의 변을 받아주는 모습도 나오고, 박보영이 902호에 침입했을 때도 할머니의 상태는 꽤나 양호해 보입니다.
친아들도 아닌데 왜?라는 의문이 들기 마련입니다. 이런 대재난 상황이라면 할머니도 대충 죽이고 둘러대는 게 더 편하고 현실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병헌의 캐릭터를 차근차근 되짚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이벙현에게 집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한 '꿈'이 투영된 장소입니다. 이벙현은 대지진이 일어나자 가족이 있는 미용실로 가고, 가족이 전부 죽었음을 확인하고 오열합니다. 그렇게 902호로 돌아왔겠죠. 원래 가족을 잃어버린 이병헌은 902호의 세입자가 되면서 새로운 삶에 점점 몰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작게는 할머니가, 크게는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이 자신의 새로운 가족이 된 거죠. 어떻게 보면 새로운 삶을 통해 꿈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놓고 보면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는 느낌이랄까요?
또한 집에 대한 애착도 굉장히 심한 편이죠. 자신이 원래의 삶에선 가지지 못했던 것이니까요. 집에 들어올 때는 신발을 벗으라는 멘트가 그 애착을 보여줍니다. 903호 세입자에게도 왜 신발을 벗지 않고 들어가냐고 묻죠. 903호 세입자는 추우니까 그렇다고 하죠. 이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이병헌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목숨이 거의 끊어져가는 상황에서도 침입자들에게 왜 신발을 신고 들어오냐는 멘트를 남기죠. 남들이 훼손하는 내 '집'은 단순히 집의 훼손이 아니라 내 '꿈'의 훼손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박서준에게 집이란 '가정'이다]
박서준에게 집이란 '가정'입니다. '자신'의 가족과 안전하게 지내는 공간이죠. 박서준은 자신의 아내인 박보영을 보호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박보영이 처음에 외부인을 집으로 들였을 때 탐탁지 않아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박서준에게 집은 내 '가족'이 지내는 공간이지, 남과 함께 공생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박서준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슈퍼에서 사람을 때리고 물건을 빼앗아오는 장면이 이를 보여주죠.
슈퍼씬도 한 번 되짚어 볼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나중에 박보영이 박서준에게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추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박서준은 사람이 죽진 않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요? 슈퍼에 무단으로 침입하려고 한 것도 아파트 사람들이고, 조용히 물러나면 될 상황에서도 슈퍼주인을 공격하고 물건을 전부 빼앗은 것도 아파트 사람들입니다. 관객들이야 아파트 사람들에 몰입해서 상황을 놓고 보니 총으로 아이를 협박하는 슈퍼주인이 나빠보일 수 있겠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보면 어떨까요? 정말 슈퍼주인이 나빴을까요? 어쩔 수 없이 두드려 패야하는 상황이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서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수 있죠. 내 '가족'을 지키는 게 1순위인 박서준에게는 슈퍼 주인 및 가족의 안위보다는 내 '가족', 내 '아파트'의 생존이 더 중요했을 테니까요. 추가적인 물품이 시급한 상황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박서준과 같은 캐릭터가 재난 상황에서 가장 일반적인 (비율이 높은) 사람이 아닐까 싶네요.
[박보영에게 집이란 모두를 위한 공간이다]
박보영에게 집이란 모두가 다 같이 안전하게 지내는 '안전 가옥'의 느낌이 강합니다. 극 중에서 연민과 동정이 많고 남을 계속해서 도우려고 하는 캐릭터이죠. 재난 상황에서는 흔히 말하는 '발암캐'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제 재난상황에서 박보영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에서 발생한 여러 재해상황에서 나타난 의인들을 생각해 보면 그렇죠. 의외로 남을 더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박보영은 공생을 위한 노력을 많이 합니다. 처음에 외부인에게 집을 내어주기도 하고, 몰래 다른 호수에 숨어있는 외부인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903호 세입자가 돌아왔을 때도 뭐라도 하나 챙겨주려고 한 게 박보영이었죠.
박보영에 대한 이야기는 '집'에 대한 의미보다는 영화 전체적인 부분에서 좀 짚어보겠습니다.
[선악은 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선악의 구분이 없는 캐릭터의 입체적인 면모들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박보영 이전에 먼저 이병헌을 봐볼까요? 이병헌은 902호 세입자를 죽인 살인자이지만, 동시에 황궁 아파트를 위해서 가장 노력한 사람입니다. 영화 초반부에 아파트에서 불이 났을 때 불을 끄기 위해서 가장 먼저 들어섰던 게 이병헌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민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죠. 이병헌의 행동은 황궁 아파트 내에서의 입지를 생각한 계획적인 행동이었을까요? 아니요. 그냥 그런 사람이었던 겁니다. 사람을 죽인 나쁜 사람임과 동시에 902호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황궁아파트 사람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 하지만, 자신의 치부가 밝혀지자 원인이라 생각하는 903호 세입자를 던져 죽여버리는 악독한 사람. 그런 와중에 외부인의 침입으로 싸움이 일어나자 앞장서 열심히 싸우는 사람.
사람은 악하거나 선하거나 둘 중 하나의 모습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동전처럼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죠.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악마 같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병헌만 이런 모습을 보여준 건 아니었죠. 박서준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박서준을 슈퍼 주인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천하의 죽일 놈이죠. 자신을 공격해서 모든 물품을 빼앗은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박서준의 천성이 나쁜 걸까요? 아닙니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을 돌이켜봅시다. 박서준은 길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 애씁니다. 끝까지 돕다가 결국 포기하는데, 도망가기도 바쁜 상황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쉽지 않죠. 천성은 박보영처럼 연민과 동정이 많은 착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박서준 역시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을 모두 보여줬죠.
마지막으로 박보영을 보겠습니다. 박보영은 마냥 선한 사람일까요? 이상적인 행동을 많이 하긴 했습니다만 현실적인 부분을 볼 때 박보영의 행동이 절대적인 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원은 한정적이고, 모든 기반시설은 무너졌기 때문에 모두 하하 호호하고 지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죠. 이런 상황에서 '다 같이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마냥 선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또한 박보영의 행동은 아파트를 파국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주민 대표가 902호 세입자가 아닌, 902호 세입자를 죽인 외부인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밝히죠. 큰 틀에서 봤을 때는 이 역시 선한 행동일 것입니다. 남들에게 누군가의 거짓을 고하는 것이고, 특히 그 사람이 주민대표인 만큼 이는 중대한 사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결과로 903호 세입자가 죽었고, 주민들은 와해되었으며 그 와중에 외부인의 습격을 받아 아파트가 폭삭 망했죠. 이 과정에서 남편도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습니다. 선한 행동이 낳은 최악의 결과죠. 결과가 최악임에도 과정이 착했으니 착한 것일까요? 생각해 볼 만한 문제입니다.
박보영은 영화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또 다른 외부인들에게 아파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답변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입니다. 그전까지 박보영은 아파트 사람들이 (특히 자신의 남편인 박서준이) 미쳐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 마지막에 도달해서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답변했을까요? 마지막에서야 박보영은 깨달은 게 아닐까요. 사람이 미친 게 아니라 상황이 미쳤다는 것을요.
여러모로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나라면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되네요. 영화 내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겠지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인데 때로는 틀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미쳐있는 데 말이죠. 주변의 환경은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때로는 누군가 나와 다른 의견을 이야기 할때는 그 사람의 환경을 살피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한 발씩 양보해서 서로를 이해한다면,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