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풀스포가 들어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영화 '잠'을 보고 왔다. 간단하게 영화를 설명하자면 신혼부부인 정유미와 이선균(극 중 이름 대신 배우 이름을 사용) 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보여준다. 이선균은 몽유병으로 이상행동을 일으키고, 정유미는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나름의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영화 자체는 상당히 잘 만든 공포/스릴러물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흠잡을만한 곳이 없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인상적이었던 몇몇 부분을 공유해볼까 한다.
[있을 법한, 그래서 더 무서운]
영화의 대부분은 신혼부부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굉장히 익숙한 배경, 한정적인 공간에서 두 배우의 힘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정유미와 이선균 모두 연기력이야 뭐 두말하면 입 아픈 배우들이고, 역시나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영화는 정말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이선균의 몽유병과 이상행동. 이를 치료하고자 수면 클리닉에 가고 약을 먹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지만 이선균은 쉽사리 치료되지 않고 점차 심해지는 증상, 결국엔 무당의 힘을 빌려보는 정유미. 정유미의 경우 처음엔 무당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지만 점차 맹신하게 된다. 매달릴 곳이 없는 절박한 사람의 심정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살다 보면 이런 비슷한 일들을 목격하게 된다. 특정 종교에 심취해 사람을 죽이는 기사가 종종 보이듯이 말이다.
이 영화는 사람이 죽는 장면은 없다. 귀신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참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잘 조성했다. 영화는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사람들의 상상에 맡긴다. 특히 이선균의 몽유병이 발현되는 저녁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감추기도 한다. 다음날 아침 정유미가 몽유병의 흔적을 따라가며 기괴한 모습들이 드러난다. 강아지 후추에게 침대 밑에서 나오라고 손짓할 때 묻어있는 핏자국, 냉장고 앞에 음식 쓰레기와 함께 떨어져 있는 후추의 털.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가져갈 수 있는 '상상 속 공포'의 효과를 잘 활용한 것 같다. 때로는 직접 보여주는 것보다 상상하게 만드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다.
[치밀하게 설계된 영화]
이 영화, 치밀하게 잘 설계된 영화이다. 결말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면서, 그리고 두 가지의 열린 결말로 끝을 내면서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납득이 되게끔 구성해 놨다. 자세히 적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 결말부가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흔히 열린 결말이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밑도 끝도 없이 열린 결말을 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잠'은 그런 면에서는 결말을 위해 치밀하게 설계한 모습들이 돋보인다.
크게는 현대의학과 무속신앙. 몽유병과 귀접이 대결하는 모양새이다. 얼굴을 긁는 행위나 냉장고에서 날 것을 먹는 행위를 몽유병의 행위로 볼 수도, 귀접당한 사람의 행위로 볼 수도 있다. 이선균이 밤에 이상행동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은 약을 바꿔서일 수도, 정유미가 추진한 굿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선균의 입장에서 그리고 정유미의 입장에서 각각의 행동 그리고 결과를 바라보면, 서로 자신이 맞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정유미가 정말 미쳐버린 걸까? 아니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게 흘러갔다. 특히 이선균의 경우는 자신의 몽유병 행동을 볼 수 없었지만 정유미는 모두 봤다. 음식을 먹는 행동,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는 행동, 화장실을 쾅쾅 치다가 거실에 소변을 누는 모습 등을 모두 봤다. 자신의 강아지인 후추가 죽은 모습까지도 말이다. 이선균은 단순히 병적행동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겠지만, 정유미에게는 아니었을 것이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는 문구는 영화를 관통한다. 정유미는 이선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 결과가 무속신앙으로 향했을 뿐이다. 그녀의 진심은 결국 범죄행위로까지 이어진다. 부부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제법 섬찟하다. 아마 정유미의 편부모 이력이 '극복'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또한, 이선균의 작중 역할을 배우로 설정한 것도 결말을 위한 장치였구나 싶다. 이런 여러 가지 사소하다면 사소한 역할이나 배경 등이 어우러져서 결말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곱씹을수록 재밌는 영화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떤 결말을 선택하셨을지 궁금하다. 작품의 처음과 끝은 코골이이다. 누구의 코골이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마지막의 코골이에 조금 집중해 보자. 이제 모두 끝났다는 안도감에 단잠에 빠진 정유미의 코골이였을까? 다시 악몽의 시작을 알리는 이선균의 코골이였을까? 상상의 재미를 더해주는 영화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