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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wa Lee Feb 01. 2019

01. 프롤로그 : 나의 상비 식량 리스트

한정된 상황에서 야매로 요리하는 방구석 식탐 일기

작년 여름부로 직장을 그만두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완벽한 집순이로 변했다는 것을.

이전까지의 나는 집에 좀체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휴일에도 반나절 이상 쉬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탓에 카페라도 가곤 했는데, 짧은 직장 생활 동안 '집가서 쉬어야지'라는 생각을 매일같이 하다 보니 어느새 집이 마음속의 안락함 일 순위로 자리매김해버렸다. 과거의 내가 해 오던 일들과 습관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정말 갑작스러운 변화다.


아무튼 몇 달째 집에 있는 생활을 영위하며 나는 세 가지가 늘었다. 식탐과 요리실력, 그리고 몸무게.

애초에 요리와 음식을 좋아하는데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틈이 날 때마다 만들어 먹는 걸 반복하게 된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아직 가족들과 같이 사는 고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오븐이나 커피메이커 같은 용품들을 마음대로 사들일 수 없다는 점이 그렇고, 가족들과 식사 패턴이 다르기에 엄마가 부엌을 사용하는 시간 이외에만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나는 한식 위주의 '밥'은 거의 이틀에 한두 번 꼴로만 먹는다.)


나를 포함한 우리 식구들은 다들 참 잘 먹는다. 바나나, 우유, 과자 같이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루면 자취를 감춘다. 아빠와 나는 입이 심심하면 당근, 고구마, 심지어 무 같은 것도 생으로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먹고 싶은 것이 먹고 싶은 때에 이미 사라져 있다) 가족들은 먹이 저장고처럼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공용공간에 있는 귤 한 박스는 누구라도 오며 가며 먹지만, 방에 귤을 가져다 두면 건드리지 않는 식이다. 엄마는 주로 과일이나 떡, 그리고 사탕이나 초콜릿을 두고 먹고, 동생은 편의점 간식이나 프로틴 파우더를 두고 먹는다. 나의 경우는 효모빵을 아침 대용으로 사두는 편이며 그 밖에도 떨어지지 않게끔 신경 쓰는 식재료가 몇 가지 있다.


아래에 그 리스트를 정리해 보았다. 공통적으로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며, 눈치 보지 않고 간편하게 조리하거나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나의 상비 식량 리스트


유제품류


버터

:  브릭형으로 된 것을 두 세 덩이 사뒀다가 각설탕보다 약간 크게 잘라 소분해둔다. 베이킹 재료 사이트나 온라인 식재료 마켓 등에서 구매한다면 의외로 성분이 좋은 천연 버터(제품 이름이 'ㅇㅇ버터'라도 버터를 일정량 함유한 마가린 혼합제품이 많다.)를 가공버터보다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각종 요리에 사용하거나 그대로 잘라 빵에 샌드 하여 먹는다.


치즈

: 나는 단 종류의 군것질보다는 짠맛 나는 간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허나 밀가루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져 과자는 잘 먹지 않는다. 야심한 밤 왠지 짠게 당기면 나는 치즈를 잘라먹는다. 치즈의 종류야 무궁무진 하지만, 마트에서 덩이로 파는 고다, 체다 치즈 등을 사다가 샌드위치나 샐러드를 할 때 넣어먹는다.



과채류


냉동과일 (각종 베리와 아보카도)

: 개당 이 삼천 원 내외의 아보카도를 후숙에 실패하여 버리게 된 것을 계기로 냉동과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본연의 식감을 살리는 경우에는 생과육이 좋겠지만, 갈아먹거나 으깨서 요리에 곁들이는 정도라면 보관이 용이한 냉동과일이 가성비면에서 한참 앞선다. (유통과 보관이 까다로운 베리나 아보카도의 특성상 냉동제품이 생과일보다 특히 저렴하다!)


냉동 그린빈

: 그린빈은 볶음요리를 할 때 유용한데, 냉동상태에서 뚝뚝 분질러 볶음밥을 할 때 넣어도 좋고, 볶음 누들이나 에그 인 헬 같은 단순한 요리를 할 때 넣으면 색과 식감을 더해주기에 좋다. 코스트코에서 대량으로 쟁여둔다.

 

레몬즙

: 동남아풍 요리, 해산물 요리, 느끼한 모든 음식에 몇 방울씩 뿌려주면 상큼함을 더할 수 있어 여러모로 유용하다. 간단한 칵테일을 만들 때도 사용한다.  



곡물 / 견과류

오트밀

: 시리얼은 왠지 설탕을 잔뜩 먹는 기분이 들어 오트밀에 입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니 왠지 물에 불린 신문지를 먹는 것 같아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웬걸, 야매로 만든 오트밀 쿠키가 성공한 이후로 견과류가 든 오트밀을 갈아 쿠키를 만드는 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팬케이크 반죽에 오트밀 가루를 더해도 어쩐지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카카오 닙스

: 잘잘한 생김새 때문에 처음에는 손이 안갔다. 하지만 쿠키에 한 줌씩 넣어 먹고, 커피 대용으로 우려 마시다 보니 역시 초콜릿의 원료답게 향이 풍부하고 소량만 먹어도 (90% 카카오 초콜릿 맛과 흡사하여 많이 먹을 수도 없다.) 군것질 욕구가 충족돼는 매력이 있더라. 요즘은 매일 같이 먹고 있다.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여 몸에 좋은건 덤.


땅콩버터

 : 학원에 다니던 시절, 점심시간이 늦어 쫄쫄 굶다가 무엇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친해진 식품이다. 아침잠은 많아 밥 먹을 시간은 없고, 남들 잘 먹는 우유나 두유는 잘 맞지 않아서 생각해 낸 게 땅콩버터였다. 애초에 땅콩버터는 고기를 대체할 만큼 고열량인 데다가 포만감이 있어 환자들이나 전쟁 군인을 타깃으로 만들어진 게 시초라 한다. 생각해보면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땅콩버터를 퍼먹으며 다녔나 싶지만, 생각보다 첨가물도 많이 들어가지 않고 (볶은 땅콩을 갈면 땅콩버터가 된다. 시중 제품은 여기에 소량의 소금이나 보존제가 더해진 편이다) 부담 없이 포만감을 느끼기에 좋다.

 

천연 효모빵

: 주로 선호하는 빵들은 재료가 단순한 치아바타, 통밀빵, 포카치아 류. 어느 날 천연발효종으로 만든 빵 을 먹어본 뒤 속이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물론 개인차이가 있겠지만) 떨어지지 않게 쟁여두고 있다. 파리바게트의 토종효모빵이 손쉽게 구매할 수 있어 애용하고, 바질 페스토와 마카다미아가 가득 든 노아 베이커리의 '파리의 연인'이라는 빵도 애정 한다.



그 밖의 것들


쌀국수와 쌀국수 파우더

: 동네에 외국인 유학생이 많아 수입 식재료를 많이 판다. 마트에서 글씨도 못 읽는 정체불명의 파우더를 호기심에 사왔는데 글쎄 태국식 쌀국수 국물 맛과 똑 같았다. (팔각 정향 기타 등등이 들어간 시즈닝인듯 했다) 여기에 숙주, 소고기, 레몬즙을 더해준다면 무난하게 괜찮은 쌀국수 한 그릇을 과장 보태어 라면 끓이는 정도의 수고만으로 맛볼 수 있다.


계란면

: 면이 탄력 있으면서도 똑똑 끊겨서, 중식 요리나 볶음요리할 때 좋다. 나는 주로 야채를 왕창 먹고 싶을 때 계란면과 함께 굴소스나 간장소스에 볶아 먹는다.


커피 원두

: 나는 원두 1킬로를 한 달 안팎으로 소진할 정도로 커피를 자주 마신다. 때문에 추출도 간편한 방식을 선호한다. 전동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고, 에어로프레스(주사기 원리를 이용한 추출기구)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여러 음료를 만들어 마신다. 가벼운 맛 보다 어느정도 크레마가 있는 커피를 원한다면 에어로프레스에 스테인리스필터를 사용해 보시길.


각종 향신료

: 좋아하는 인도카레를 만들어 먹자는 심산으로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인도 카레는 양파를 버터에 갈색이 될 때까지 볶다가 큐민+ 강황 + 마살라(인도음식에서 자주 사용되는 혼합 향신료 가루)를 적당히 넣는 게 베이스이며, 여기에 각종 고기나 치즈, 시금치, 우유 같은 부가 재료를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진다. 이밖에도 나는 새로운 맛을 좋아하여 여행을 가면 향신료를 구매해 오고는 한다.   


: 일본 소주, 증류식 소주(대장부 혹은 화요) 진, 위스키, 연태 고량주를 좋아한다. 기본적으로 배가 부르지 않고, 성질이 차지 않으며 깔끔한 술이 잘 받는다. 이들을 베이스로 야매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거나 스트레이트로 영화를 보며 홀짝이는 것을 좋아한다.




위 식재료 리스트에서 이미 눈치챘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인위적인 맛보다는 본연의 맛이 나는 단순한 음식들을 즐기는 편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음식이 있고, 그 섬세한 즐거움을 생각하자면 많은 요리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 독립을 하지 않았으므로, 가족의 식사패턴과 주방의 불문율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나만의 식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중이다.


<방구석 식탐 일기>는 그럴듯한 레시피나 맛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애정하는 식재료들을 한정된 조건 내에서 어떻게 탐 하고 있는지에 대한 소소한 일기에 가까울 것이다. 앞으로 등장하는 음식들 역시 위 리스트의 재료를 몇 가지 조합해서 만들어낸 아주 단순한 것들이다. 취향에 맞는 식사 한 끼는 몸과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각각의 재료에 얽힌 나의 이야기들은 앞으로 차차 풀어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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