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나간 뒤 부엌에서 일어나는 일
주로 잠드는 시간은 새벽 두 시, 기상시간은 아홉 시에서 아홉 시 반. 이보다 덜 자면 종일 기분이 저조하고, 더 자면 그것대로 머리가 멍하여 평균 일고 여덟 시간의 수면을 지키려 노력 중이다.
나는 조금만 방심해도 금방 올빼미 패턴으로 돌아가는 전형적인 야행성 인간이다. 일찍 일어날래, 안 자고 버틸래, 라는 극단적인 주문을 한다면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사람. 아침에 약속이 잡히면 일어날 자신이 없어 밤을 새우고, 초췌한 와중에도 새벽이 되면 정신이 또렸해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기로 했다. 새벽 감성은 두시까지만 즐기는 대신 모든 가족이 자리를 비운 오전에 자유를 누리기로 한 것이다.
일단 알람이 울리면 자리에서 기어 나와 마루에 털썩 누워 햇빛을 받으며 잠을 깬다. 부스스한 고양이도 따라 나와 곁에 앉는다. 밥 달라 보채는 고양이가 슬며시 몸을 비벼오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음악을 틀고, 부엌에서 할 일들을 궁리한다.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을 먼저 해 놓고 그 사이사이 잔 일들을 한다.
그리하여 첫 번째 할 일은 쑥물 끓이기. 몸이 찬 나를 위해 친구가 준 인진쑥을 감초, 대추 등과 함께 다시백에 넣고 냄비에 푹 끓인다. 찰랑이는 물이 절반에서 1/3 정도로 줄어들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40분. 집안에 훈훈하게 나는 쑥 향을 킁킁 들이마시며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이제 다음 할 일은 팬케이크 굽기.
팬케이크 믹스를 볼에 부은 뒤 계란과 우유를 넣고 잘 섞는다. 도톰한 팬케이크를 좋아하여 반죽은 되직하게 만들고, 단맛을 줄이기 위해 오트밀 가루를 섞어 농도를 맞춘다. 원래 팬케이크는 번거로워 잘 손이 가지 않았는데, 냉동보관을 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한 번에 대 여섯 장씩 만들어서 그때그때 해동하여 먹고 있다. (팬케이크 사이에 종이 포일을 겹쳐 냉동보관해두면 매번 반죽하는 수고를 덜 수 있다).
팬케이크 굽기 노하우는 사실 러시아에서 터득했다. 엄마와 여행차 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쿠킹클래스에 참여했는데, 배운 음식 중 러시아식 팬케이크 (메밀전병 맛에 더 가깝다) '블린'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이 넘치는 쿠킹클래스 덕에 무쇠 주물 팬으로 얇은 반죽을 두시간 내리 구워야 했다. 눈물을 머금고 명절 전부치 듯 블린을 구워내며 얻은 몇가지 팁이 있다면, 기름은 팬을 코팅할 정도만 두르기 / 처음에 중불로 팬을 달궜다가 반죽을 올린 뒤 중약불에서 계속 굽기 / 기포가 올라오면 아랫면이 다 익었다는 신호이며, 이때 팬을 살짝 내리치면 고른 표면을 가진 팬케이크를 구울 수 있다는 것/ 이다. 팬케이크가 완성되면 먼저 구운 것은 식혀두고, 갓 구운 것 위에 버터 두조각, 냉동 베리, 꿀을 올린 뒤 그것들이 녹아들기를 기다리며 잠시 테이블에 놓아둔다.
다음 할 일은 커피 내리기.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아 물을 부은 뒤 뜸을 들인다. (이때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가고, 맛이 우러나온다.) 그 사이 계란을 휘휘 저어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고 불을 끈 뒤, 남은 물을 원두에 부어준다. 이제 따듯한 커피,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팬케이크가 동시에 완성.아, 그리고 먼저 달이고 있던 쑥물도 지금쯤 진하게 우러나 있으니 가스레인지를 끈다
드디어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고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요리를 동시에 하다 보면 실없이 분주한 기분도 들지만, 모든 것이 한 번에 착, 끝나고 자리에 앉을 때는 기분이 좋다.
이렇듯 오전은 식사를 준비하며 식재료들을 준비하느라 늘 분주하다. 일주일치 팬케이크를 굽거나, 버터를 소분하여 통에 옮겨 담고, 쿠키를 구워서 식혀두느라 말이다. 그러다 보면 새벽 운동을 다녀와 쪽잠을 자던 동생이 부스스하게 일어나고, 운동을 마친 엄마가 귀가를 할 시간이 된다.별일 없었다는 듯 그들을 맞으며 나는 혼자의 시간이 끝난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오전 아홉 시에서 열두 시, 내가 가장 부지런해지는 식탐의 시간이 흘러가고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