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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글 Jun 27. 2021

하루하루 의존하는 서툴고 불완전한 '우리'

『짐을 끄는 짐승들』, 수나우라 테일러 씀, 오월의봄, 2020

민들레 vol.134 함께 읽는 책

장애의 기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건강하셨던 할머니가 90세에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 장애 등급을 받았을 때 조금 의아했다. 그 연세에 혼자 힘으로 잘 움직이지 못하시는 걸 ‘장애’ 등급으로 매길 일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움직이는 몸=장애’라는 사실을 그렇게 학습했다.

몇 년이 지나서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 장애인이라는, 본인도 몰랐던 사실을 당사자와 동시에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흔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남들보다 시야가 현저히 좁다는 사실을 성인이 된 후 어쩌다 알게 되어 어느 날 갑자기 ‘장애’ 판정을 받은 경우다. 그의 몸은 그 자체 그대로인데 사회적 기준에서 ‘심각한 장애를 가진 신체’가 된다는 사실을 본인과 주변인이 그렇게 배웠다. 왼손 손가락이 모두 네 개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던 어릴 적 동네 아이도 떠올랐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장애인’을 호명할까.      


낯선 설정 앞에 길을 잃다     

『짐을 끄는 짐승들』을 쓴 수나우라 테일러는 작가이자 화가이며, 관절굽음증을 가지고 태어난 장애인 당사자다. 관절굽음증이라는 낯선 단어를 ‘소’에 붙이면 금세 익숙해진다. ‘다우너 소Downer Cow’. 좁은 축사에 갇혀 있다 몸에서 칼슘이 빠져나가버려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소를 일컫는 말이다. 단체로 ‘폐기 처분’되는 사진과 영상에 단골로 등장하는 가축과 같은 병을 가진 저자가 ‘동물’과 ‘장애’를 촘촘히 엮었다.

미군이 몰래 버린 화학약품으로 인해 선천적 장애를 갖게 된 저자가 ‘장애와 환경’을, 나아가 ‘동물과 환경’을 엮은 것은 필연적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과 가축, 장애를 정체성으로 인정하는 움직임, 장애를 발생시키는 환경, 장애를 동물과 대립시키거나 동일시하는 획일화된 시선, 질문과 억압, 이 모두를 포함하는 거대한 배경에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걸어갈 것인지를 꼼꼼히 묻고 있다. 끈질기게 파고드는 섬세한 질문과 사유 덕분에 이 책을 읽는 것은 어지러울 정도로 혼돈스러웠다. 배가 항해를 하려면 지금 정박한 위치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책은 나의 위치를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을 안긴 첫 번째 일화는 침팬지 부이의 이야기였다.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태어난 부이는 영장류학자 로저에게 수어를 배웠다. 부이는 로저에게 별명을 붙이고 질문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소통능력을 갖췄지만 연구소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13년이 지난 후에야 방송국의 지원으로 둘은 재회했고, 부이는 놀라운 기억력과 소통 능력으로 대중의 반응을 이끌어내 겨우 죽음을 면하고 비영리 동물보호소로 옮겨졌다.

부이의 소통 능력 자체도 놀라웠지만(책에는 인간과의 소통능력을 지닌 다른 영장류도 여러 번 등장한다)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낸 근본적인 이유가 ‘부이가 보인 인간적 특성’ 때문이라는 저자의 통찰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어지러웠다. 고통에 눈물을 보이고(쾌고감수능력), 언어를 사용하는 지적인 면을 드러내는, 즉, 인간적 특징을 가진 동물만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아니, 믿고 있는 줄도 몰랐던 당연한 명제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지독한 종차별주의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나서 혼자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지난 몇 년간 함께 책 읽기로 다양한 환경을 접하며 시각의 저변을 넓혀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비장애중심주의’는 ‘종차별주의’와 ‘신경전형주의’인 인간중심, 나아가 능력 중심의 근대적 세계관의 핵심이었고 나는 여전히 이 뿌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청소년들과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고 있는데, 마침 최근 모임의 주제가 ‘뇌과학’이었다. 청소년용 뇌과학 책의 도입부에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현재의 문제를 잘 해결해나가는 능력이 ‘지능’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우리가 흔히 ‘지능’이라 알고 있던 논리력, 계산력, 추론력을 초월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동물 사이의 지능 비교(고양이와 개 중 누가 더 똑똑할까요?)는 질문이 될 수 없다는 사실과 지능이 없다고 믿었던 식물 지능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청소년들은 모두 ‘아!’ 하는 탄성을 조용히 내었다. 무거운 각성의 소리였다. 부이가 ‘탈출’하기 위해 인간을 따라할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한 것이라면? 축적되어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재화와 문화의 총합이 ‘문명’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역시 지극히 인간 중심의 개념이라면? 몇 킬로미터를 헤엄쳐 조상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물고기의 위치감각 유무로 ‘문명’의 개념을 판단하는 생명체가 있다면? 테일러는 정확히 이 지점을 물었고, 나는 마치 남반구의 어느 나라가 중심이 된 지도를 펼친 것처럼 낯선 설정 앞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어느 누구도 천사는 아니다     

두 번째 충격을 안긴 것은 저명한 동물학자인 피터 싱어와 템플 그랜딘의 이론을 해석하는 저자의 관점이었다. 테일러는 동물권 운동가들에게 바이블과도 같은 책 『동물해방』을 쓴 피터 싱어의 이론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만이 가진 도덕적으로 중요한 능력이란 없다. 예컨대 모든 동물이 언어를 갖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언어를 갖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136쪽)”, “어떤 능력이 도덕적 판단과 직결되어 있는지를 결정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136쪽)” “누가 도덕적으로 더 가치 있는 존재인지 밝힐 수 있음(137쪽)”이라는 암묵적 전제 자체는 피터의 신경전형적인 관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피터가 말하는 ‘모든 인간이 언어를 갖는 것도 아닌’에 해당하는 인간의 지위(예컨대 지적장애인의 경우처럼)는 ‘동물’과 대립하여 ‘장애’와 ‘동물’ 모두의 가치 추구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신경전형적인 인간 역량을 지닌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본질적으로 더 가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견해를 반박해야 한다(139쪽)”고 저자는 설명한다. 한 집단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집단과의 관계를 충돌하게 만드는 함정을 그 유명한 『동물해방』에서 저지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주 들어왔다.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자는 주장에 대한민국에도 굶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대응,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구호에 빈민층 구제가 먼저라는 비교, 소상공인 지원에 노점상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불만…. 하지만 공감과 연대는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튀어 오르는 시소가 아니다. ‘동물해방’을 위해 ‘장애해방’이, 혹은 ‘장애해방’을 위해 ‘동물해방’이 작아져야 하는 갇힌 방도 아니다. 공감에는 한계가 없다. 이 당연한 명제가 테일러의 목소리를 통해 찬란하고 눈부시게 다가왔다.  


템플 그랜딘의 경우도 비슷했다. 나는 그를 자폐증을 극복하고, 그리스 신화의 멜람푸스처럼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놀라운 능력으로 ‘동물 복지’에 힘쓰는 이상적 존재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는 ‘동물복지 도축장’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공장식 도축장에 비해 동물들에게 최대한 공포를 덜 주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시각이 치우쳐 있다며 그랜딘의 모순을 조목조목 파헤친다. 맥도날드나 버거킹 같은 거대 회사의 자문을 맡으면서 ‘인도적인 도살장’을 설계하는 그랜딘의 이론이 “궁극적으로 장애를 가진 인간 존재와 비인간 동물이 신경전형적이고 비장애중심주의적인 패러다임 속에서 어떻게 억압받고 착취당했는지 문제제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301쪽)” 것을 지적한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멸종하게 될 ‘종’의 존속을 위해 ‘인도적인 도살장’을 설계한다는 템플 그랜딘의 주장이 왜 비판받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나는 2020년 5월부터 육고기를 먹지 않지만, 주중 가족 식사를 주로 담당한다는 이유로 여전히 육고기 구매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고기: 자연재해’ 부분은 나름의 대안으로 ‘자연 방목 흑돼지’, ‘슬로우 미트 한돈 뒷다리’, ‘녹차 닭가슴살’을 검색하던 손길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현실을 명확히 바라보게 했다. ‘녹색’이란 이름은 현장의 피와 오염을 덮는다.


피터 싱어나 템플 그랜딘을 비롯한 철학자와 행동가가 모조리 틀렸으며, 수나우라 테일러의 모든 언어가 정답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세한 질문의 씨앗에 물을 주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를 신뢰할 수 있고 나아가 응원할 수 있게 되었다. 곳곳에서 드러난 경험과 작업, 철저한 공부와 성실한 사고 과정, 피터를 비롯한 많은 이들과의 진심 어린 소통과 경청의 태도에서 그녀가 어떤 자세로 오늘을 살아내며, 더 많은 이들과의 내일을 꿈꾸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해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중이며, 그곳으로 함께 갈 수 있다고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는 누구일까. 책에서는 종종 지칭하는 바가 달라졌다. 어떤 때의 ‘우리’는 테일러가 포함된 장애인 당사자를 일컫는 말이었으며, 어떤 ‘우리’는 동의하는 장애 모델이 같은 입장인 이들을 가리켰으며, 또 어떤 ‘우리’는 ‘인류’ 전반이기도 하다. 결국 마지막에 테일러가 손을 내민 ‘우리’는 ‘종’과 ‘장애’를 넘어 우주 생명체 그 자체라고 느껴졌다.

공감의 확장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는 사실도 책에서 배웠다. 1980년대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DIIAAR은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정체화하면서 장애라는 렌즈를 통해 동물문제를 탐구했던 동물운동가 단체로, 유일하게 장애와 동물을 연관 짓는다. 이들은 ‘장애인이 장애인 대신 동물이 실험 대상이 되거나 학대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 단체를 만들었다(326쪽). 의사와 의대생으로 이뤄진 미국의사연합은 이들의 동물옹호운동에 맞서 동물실험을 통해 생산된 의약품의 도움을 받은 환아들을 거론한다. 하지만 DIIAAR은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의 공존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러 대안적 방법으로 알리며 직접 행동했다. 우리의 공감이 평행선을 따라 종적으로만 늘어나는 것이라면 이런 단체는 3021년에도 가능하지 않을 테다.        


궁극의 목표, 모두의 의존     

테일러는 ‘상호의존’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서 성큼 다가선다. 테일러는 자유주의자인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할머니는 장애인인 내가 얻는 것 모두에 감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숲속에” 그대로 남겨진다면 “거기서 죽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자연 상태”에서 내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이 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누군가가 자신의 산딸기를 친절하게 나눠주지 않는다면 혹은 (할머니가 그랬듯) 고기 한 조각을 내게 나눠주지 않는다면 나는 금세 굶주리고 말 것이다. 굉장히 특이한 성격이었던 할머니에게 토를 다는 말이 되겠지만, 할머니의 기본 명제는 흔히 마주하는 사회적 통념과 다를 게 없다. 자연에는 장애인을 위한 자리가 없고, 장애인은 다른 사람들의 선의가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통념 말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비장애인인 내 동생들 역시 인간의 도움이나 도구 없이 혼자 남겨지면 결국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놓쳤다. 나보다는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그들 역시 금방 죽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349쪽).”


의존은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나는 베트남의 공장 노동자가 만든 옷을 입고, 경남 하동의 옥종에서 농부가 재배한 딸기를 먹는다. 지금은 명함을 잃어버려 이름을 잊은 어느 기술자가 설치해준 인터넷을 이용해서 미국의 여러 개발자가 만든 프로그램으로 몇 개의 책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자립적인가. 개인의 신체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자립’의 개념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삶은 의존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테일러는 강조한다.


중학교 3학년이 된 큰 아이와, 초등 최고 학년이 된 둘째가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 ‘사고로 인한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화제에 올렸다. 둘째는 그런 일이 생기면 자기도 따라 죽을 거라며 울상이 되었고, 큰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나는 살짝 웃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희들에게는 또 의지할 누군가가, 사랑할 대상이 반드시 생길 거라고. 물론 부모를 잃은 슬픔까지 대신하긴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갈 힘을 주고받는 사람(이제 생명이라고 말해야겠다)이 틀림없이 나타날 거라고 알려줬다. 아이들은 안도하는 듯 긴 숨을 쉬며 조금 웃었다. 함께 짐을 끄는 짐승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해줄 수 없었을 답이었다.


‘불구화하다’의 ‘불구不具’는 신체장애를 일컫는 말로 말 그대로 ‘불구가 되게 하다’의 뜻이다. ‘불구’는 장애인이 장애인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며 스스로를 지칭하는 움직임으로 새롭게 재설정된 단어이기도 하다. 저자는 기존의 동물 윤리를 ‘불구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 ‘불구’를 ‘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하다’의 ‘불구不拘’로도 읽었다. 극복의 개념이 아닌 해방의 단어. 동물과 장애에 대한 기존의 사고방식, 동물성을 배제하는 인간성, 의존과 자립의 이분법을 ‘불구화’하고 ‘불구’하는 저자의 발걸음으로 읽었다. 제 위치를 몰랐던 내게 햇살의 방향을 알려준 책이다. 다시 항해의 시작이다.


나는 책모임을 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책을 더 잘 읽기 위해서 책모임을 한다. 책과 책모임 사이에는 하루하루 의존하는 나의 일상이 존재한다. 테일러의 마지막 문장처럼 “서툴고 불완전하게(372쪽)”, 서로를 돌보는 우리가 공존하며 뒤섞이는 일상이다. 잘 의존하는 오늘을 보내며 다음 책을 읽고 싶다. 두렵지 않은 항해가 될 것이다.   


종차별주의: 인간이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동물이나 식물 따위의 다른 종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태도나 사고방식.

비장애중심주의: 장애가 없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고 정상이며, 반대로 장애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상정하는 가치관이자 이데올로기.

신경전형주의: 전형적 신경을 가진(자폐증이 아닌) 뇌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 특징적인 인지 과정을 특권화하는 반면, 자폐 성향이 있는 인간이나 비인간 동물들에게 자연스러운 다른 형태의 인지 과정은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템플 그랜딘: 동물학 교수이자 <템플 그랜딘>이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그의 저서는 자폐 관련 필독서로 손꼽힌다.

DIIAAR: Disabled and incurably ill for alternatives to animal research. 안타깝게도 주요 설립자의 사망으로 현재는 그 활동이 잠잠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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