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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글 Jul 04. 2021

책모임이 도끼다

한 권은 없다

"생각이나 행동이 갑자기 바뀔 정도로 큰 영향을 준 책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 집에 처음 온 누군가가 물었다. 책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었다. 열네 개의 눈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머릿속을 재빠르게 굴렸다.

오! 하는 감탄사가 나올 수 있도록 '있어 보이는(도대체 뭐가?)' 한 권을 골라야 했다. 동의와 찬사도 기대하지 않았을까.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랬다.

당시 한참 빠져 읽던 '레미제라블'이 떠올라 자랑스럽게 답했다. 감탄을 얻기에 충분히 긴 책이었고(5권, 각각 300페이지쯤 된다), 찬사를 받기에 훌륭한 유명 문학이었다. 질문한 이는 다시 물었다.

"어떤 점에서요?"

등장인물 모두가 나름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좋았다고 답했고, 대화는 툭 끊겼다. (각 잡고 하는 자랑에는 반응도 없고 약도 없는 법이다)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나는 그의 심오한 질문과 나의 평평한 답을 오래 생각해왔다. 감탄사나 동의는 필요 없는 나만의 진짜 답. 반응 없던 반응이 새삼 고마운 이유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늦은 답이자 여전히 진행 중인 답이다. '레미제라블'이라는 책 제목 하나로 결코 채울 수 없는, '레미제라블' 권수 이상으로 길고 긴 책 여정에 얽힌 이야기.


혼자 읽은 책,

가족과 같이 읽은 책,

친구들과 읽은 책,

도서관 청소년들과 읽은 책,

이웃과 읽은 책,

생판 남과 읽은 책,

짧은 기간이었지만 남편의 어머니와 읽은 책도 있었다.


생각이나 행동이 갑자기 바뀐 '어느 날 문득' 같은 한 권은 없었다.

천천히, 아주아주 느리게, 여전히 진행 중인 수많은 책모임이 있어 왔다. 다음 책을 읽으려고 모임을 했고, 모임을 잘하려고 책을 읽었다. 친구의 마음 정중앙을 만나고, 아이의 불안과 행복을 마주했다. 나의 자유와 책임 사이에서 갈등했으며 이 갈등은 다시 친구와 가족을 책 핑계로 불러내 앉혔다. 길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어린 소년인 남편을 만났고, 시어머니가 전공하고 싶어 했던 과목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대체 시어머니의 희망 전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비효율성과 비생산성은 나를 다시 책모임으로 이끌었고, 또 다른 책을 끌어왔다. 뒤늦게 달리기에 빠진 어느 60대 여성이 '부작용 없는 중독'으로 달리기를 비유했다는데 책모임은 부작용도, 효능도 초강력한 울트라급 중독이었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가 궁금하던 내가 '있지만 없는' 미등록 이주 아동들이나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은 전쟁'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질문이 재편되고, 의문이 실존하는 현장의 한가운데를 갈팡질팡 걸었다. 아이의 학원 정보를 검색하던 손은 아이와 함께 읽고 싶은 책 탐색으로 바빠졌다. 대를 걸쳐 생각 없이 받아보던 유명 신문을 끊었고, <시사IN> 구독을 시작했다. 모일수록 알고 싶은 세계는 넓어졌고, 어떤 세계는 줄어들었으며 읽고 싶은 책 목록은 길어졌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쓰고 싶어 졌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졌다. 사람과 책을 잇고 싶어 졌고, 책과 책모임을, 책모임과 내 생활을 따로 떼어 두고 싶지 않아 졌다.


한 권은 없다.

'생각이나 행동을 갑자기 바꾼' 위대한 한 작가의 거룩한 한 권 같은 책은 앞으로도 없다.

삐삐가 부러웠던 우리 가족, '상호 불간섭'과 '독립성 보장'이라는 단어를 배우신 어머니, 멋진 남자 주인공 '테이트'에 반하고, '한지'의 사랑에 마음 쓰렸던 친구들로 채웠던 시간만 가득하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 못난 사람이지만, 어쩌면 멋있어질  근사하고 나약한 존재로 '주연'  있는 사람.  깨달음의 저변엔 책모임이 있었다.


카프카는 책이 도끼라고 했는데, 박웅현이 그 말로 유명해졌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책이 도끼가 아니라 책모임이 도끼다.


책모임이 도끼인 이야기를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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