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헌태여보(배우자), 단이(딸1/중3), 강이(딸2/초6), 지나(단이 친구)
지나는 단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친해진 친구인데 빵을 자주 만든다. 제빵 자격증도 따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단이에게 들었다. 우리집에는 와 본 적이 없어서 가족 모두 지나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언니의 인스타그램 확인이 가능한 강이는 지나와 인스타 맞팔 사이. 서로 얼굴도, 최근 활동도 알고 지내는 중이다. (내게도 인스타 계정이 있지만 단이의 활동을 확인하진 못한다. 확인한 적도 몇 번 없지만 광범위하게 뻗어있는 내 사촌이나 이모들, 그리고 나의 친구들. 그러니까 아이 입장에선 사촌 이모나 삼촌들, 할머니들에게까지 사생활을 오픈하고 싶지 않다며, 나 포함해 세대가 다른 이들을 모두 block 해 버렸다. 애초에 헌태여보는 인스타 계정이 없고 말이지. 헌태여보 현명해...)
어쨌든 강이와 지나는 언니의 절친, 절친의 동생 사이. 만나지 않아도 이미 다정할 수 있는 사이.
며칠 전 지나는 요즘 유행하는 레몬 딜 버터를 만들고선 인스타에 올렸다. 먹기와 요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강이는 지나의 딜 버터 포스팅을 보자마자 "먹고 싶다", "맛있겠다" 단이 방에 찾아가 얘길 했고, 단이도 지나의 게시물에 하트를 누르며 "강이가 맛있겠대"라는 댓글을 달았다. 절친의 동생에게 다감한 지나는 다음 날 ‘딜 버터' 한 가닥을 학교에 챙겨 왔다. "강이 전해줘". 버터가 녹을까 봐 담임 선생님께 교사용 냉장고에 넣어달라고 단이가 따로 부탁까지 한 후 무사히 강이 손에 그 버터가 들어올 수 있었다. "네네! 잘 넣어둘게요!"라고 눈을 살짝 흘기시며 선생님이 외치셨다고. (강이에게 버터 한 번 먹이려고 몇 명 손을 거친 거야.... 버터 한쪽 전달만 해도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세상이란 말이지...)
저녁 식사시간이 끝나자마자 강이는 빵 한쪽을 굽고 딜 버터를 바르기 시작했다.
헌태여보, 나, 단이는 모두 강이가 딜 버터 바르는 걸 쳐다보고 있었고, 굳어 있던 버터가 생각만큼 스프레드처럼 확 펼쳐지지 않자, '버터 녹일까?' '이렇게 먹는 거 맞아?' '빵을 더 데울까?' 등등의 한 마디씩을 보태며 웃었다. 쓱쓱 잘 발라지면 강이가 한 입 줄지도 모르니까. 단이는 지나에게 보여주려고 이걸 다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물론 요즘 애들답게 얼굴 하나 안 들어가게, 오로지 빵과 버터만 클로즈업해서!
"버터 하나로 왜 그렇게 재밌어?"
"그게 그렇게 다 모여서 웃을 일이야?"
"아니... 버터 바르는데 다들 왜 웃어?"
"근데 왜 식구들이 다 식탁에 나와 앉아 있어? 그럴 시간이 돼?"
단이가 올린 버터 동영상에 친구들이 건넨 말들이라고 단이가 전해줬다.
"우리 가족 목소리가 다 들어가 있었잖아. 나도 별생각 없이 올린 거였는데, 애들이 이렇대."
단이에게 인스타그램 차단을 당해도 걱정하지 않는 이유, 가족 책모임을 육 년 동안 이어오는 이유를 단이의 친구들이 다 말해줬다.
"다" "모여서" "웃는" "시간"
상대에게 내어주는 시간, 눈 맞추고 웃어주는 시간, 버터 하나에 낄낄대며 마음이 뽀샥해지는 몽글몽글한 시간, 이런 시간이 퇴적층처럼 두꺼워지고, 단단해져 있어야만 아이들도, 나도, 헌태여보도 무섭고 쓸쓸한 세상을 조금은 든든히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게 주식이나 주택, 현금이 전부인 가족이라면 마음이 빈곤해서 도대체 어떻게 살라고. 외롭고 쓸쓸할 때, 세상 혼자인 것 같을 때, 나만 뭘 못하는 것 같고 하루가 절망일 때 떠오르는 게 상속받지 못한 '삼성전자 주식'이겠냐고.
가족 책하루 멘토링을 할 때 가장 강조하는 것 또한 당연히 "시간"이다. 독서 문화를 가정에서 확립하고 싶다는 바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우선 확보해야 하는 것은 "함께 하는 시간". 청소년기에 들어선 자녀들이 갑자기는 절대 내어주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자녀들이 어릴 때는 보호자가 자주, 쉽게 내어주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오늘 같이 웃는 시간을 만들어야 내일 또 그 시간을 만들 수 있다. 내일 웃는 시간을 다시 만들고, 그다음 내일 또 웃는 시간을 만들어 내면, 슬프고 절망적인 어느 날, 쓸쓸하고 지나치게 외로운 어느 날 우리는 그 시간을 비타민처럼 꺼내 먹을 수 있을 테지.
지극히 개인적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며 가족 개념을 확장하고, 가족의 의미를 재설정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가족의 생활 속 디테일을 쌓는데 공을 들였다고 설명했다. 아버지와 아들을 잇는 것은 '피인가, 함께 보낸 시간인가' 를 묻는 감독은 딸과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며 '피가 섞였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솔직히 고백한다. "목욕을 마치고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어떤 식으로 말려줄까? 세 식구는 침대 위에 어떤 순서로 나란히 누워, 어떤 식으로 손을 잡을까?" 오래오래 고심했다는 '가족 전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나는 '시간 전문 감독'이라고 부르고 싶다. 몇 년 동안 이어오는 나의 여러 책모임이 그의 영화를 닮아가면 좋겠다.
"버터 녹을 거 같으니까 냉장고에 좀 넣어달라고 강이는 선생님께 부탁할 수 있을 거 같아?"
헌태여보가 물었다.
"나? 어후! 난 못하지!"
"신기해. 강이 어릴 때 정말 거침 하나 없었는데! 이렇게 성격이 확 변하네."
"내가 집에서만 이래, 헤헤"
이렇게 강이를 알아가는 것. 버터 만들어 준 지나의 꿈을 단이네 가족이 응원하는 것, 그러니까 버터 하나로 그렇게까지 재밌을 일이냐는 그만한 일을 자꾸 만들어가는 것. 이 목록 늘리려고 가족 책하루한다. 꺼내 먹을 영양제 가득 채우려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