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을 읽고
민들레 vol.136 함께 읽는 책
그는 왜 반말을 했을까
올해 초, 종합병원에서 작은 혹을 떼는 수술을 받았다. 일주일 뒤 수술 경과와 조직검사 결과를 보기 위해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조직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요?”
“아이, 암이면 내가 가만있나. 근종이라니까. 여기 봐봐. 여기 사진 보여, 안 보여?”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의사는 수술 전과 달리 반말을 했다. 조금 전 초음파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의사의 반말이 신경 쓰였던 나는 조용히 되물었다.
“왜 반말을 하세요? 저도 반말로 대답하면 되나요?”
창피를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의사는 갑자기 얼굴이 벌게지더니 자기가 반말을 했냐며 용서해달라는 말을 진료를 보는 중에 세 번이나 했다. 자신은 상대에게 쉽게 반말을 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믿을 수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용서를 하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로 상황을 수습하고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왜 내게 반말을 했으며 급히 사과하고 자학에 가까운 변명까지 했을까. 나이(나보다 열 살 이상은 많아 보였다), 사회적 지위나 계급(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높은 편에 속한다), 정보 소유(의사는 환자의 신체에 대한 정보를 환자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성별(사회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라고 인식된다)에서 점하는 확실한 우위를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설사 반말이 그의 원래 말버릇이라 해도 그 역시 상대적 서열 파악으로 인한 그동안의 습관을 반영할 뿐이다. 내가 그의 상사였거나 얼굴이 알려진 고위 관료였다면 그는 평소 습관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급하게 사과를 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환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갑자기 생겨서가 아니라 내가 ‘의료소비자’로서 그의 의료서비스를 판단하고 외부에 정보를 퍼뜨릴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술 전 진료를 할 때 의사는 단 한 번도 반말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곁에 있었다는 것 외엔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어를 바라보면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어의 양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평등한 언어’로 전해오던 이들이 ‘한국어 존대법’ 앞에서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사실일지라도 외부자의 시선을 거치면 가려져 있던 본질과 문제점을 여과 없이 드러나는 법. 영어학을 전공한 김미경 씨는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에서 가치를 의심해본 적도 없고, 기준이 정당한지 묻지도 않았던 우리말의 존대법을 외부자 시선으로 날카롭게 해부한다.
저자는 한국어의 ‘존대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반은 존대 규칙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하대 규칙이라고 설명한다. 존대법이 발달한 것 이상으로 하대법이 발달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7천여 개의 언어 중에서 한국어처럼 상대를 낮추는 반말이 문법으로까지 발전한 언어는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존댓말 때문에 스스로 예의 바르다고 여기지만, ‘반말을 사용하는 무례한 민족'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존댓말로 웃어른을 모시기도 하지만, 반말로 아랫사람을 짓밟는 갑질을 누구보다 많이 한다. 존대법은 예의와 무례를 동시에 포함하는 이율배반적인 어법이다.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은 단순히 문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의 의식 전체를 지배하는 동인이며, 한국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회전력이다. 한국어 존대법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한국의 서열문화의 핵심을 들여다볼 수 있는 블랙홀이다. _14쪽
존대법은 단순히 동사나 형용사에 ‘~시’를 붙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에게 어미에 '-시'와 ‘~요’를 붙이고 ‘~께서’처럼 주어의 조사를 달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문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너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주입시키는 과정이며, 사람 간에는 항상 위아래가 있다는 것을 세뇌시키는 과정(15쪽)”이라고 한다. “또한, 윗사람은 너보다 나은 사람이니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훈련하는 동시에, 사람의 높낮이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과정(15쪽)”이라고 분석한다.
존대법의 이면을 인지하게 된 나는 청소년 독서 모임에서 더 이상 반말을 쓰지 않는다. 친밀해지는 방편으로 반말을 의도적으로 썼던 시기도 있었으나, 존댓말을 쓰면서도 충분히 친밀해진 경험들이 쌓인 데다 이 책까지 읽고 나니 내가 그들에게 반말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세계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무의식중에 상대방과 자신 사이의 상대적 위치를 가늠한다. 한국어 존대법의 상대적 기준은 나의 진료실 경험에서처럼 나이, 사회적 지위, 정보, 경제력, 성별 등 다양하게 변형되며 상황에 따라 충돌한다. 동시에 상대와 비교하여 말하는 자신의 높낮이도 순간적으로 파악해야 하는(‘나’ 혹은 ‘저’) 초인지적 서열 내비게이션까지 동원해야 하는 고난도의 작업이다. 존대법에 내재한 ‘계급주의적 인간관’은 한국사회에서 끊이지 않는 갈등을 초래한다.
존대법이 가져오는 막강한 파괴력
계급주의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한 존대법이 얼마나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올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의 분석을 인용한다. 그는 228명의 사망자를 낸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 사고의 원인 중 하나를 한국의 권위적인 위계 문화에서 찾았다. 악천후에도 착륙을 강행하는 기장에게 부기장이 착륙을 포기해야 한다고 직언하지 못한 것이 참사를 낳았다는 것이다. 한국어가 윗사람을 어떻게 대접해주어야 하느냐의 문제에 얽혀 있는 구조라고 설명하며, 주고받아야 할 정보보다 상대방과의 관계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문화와 추락 사고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진단한다. 대형사고를 문화주의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상하를 구분하는 언어체계에서 ‘평등한 의사 소통’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에는 질문이 사라진다. 반복해서 발생하는 노동자 사망 사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작업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어느 정도의 숙련도를 요구하는지 노동자가 질문할 수 있을까. 상사가 아무리 부드럽게 부탁한다 한들 자유롭게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될까.
저자는 여섯 살 한국 아이가 네 살짜리 중국아이가 자기한테 존대호칭을 쓰지 않았다고 화를 내며 한 말에서 존댓말의 핵심을 찾는다. “존댓말을 안 쓴다는 건 내 말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46쪽)” 상명하복을 조장하는 핵심적인 장치로 존대법이 사용되는 명확한 사례다.*
*두 아이는 중국말로 대화중이었는데 중국말에는 존댓말이 없다. ‘니(너)’를 높여주는 말 ‘닌(당신)’이 있는 정도인데 그리 흔히 쓰지 않는다. 한국 아이는 중국 아이가 자기를 부를 때 ‘닌(당신)’이라고 하지 않아 화가 난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인 큰 아이가 전해준 청소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갓 입학한 1학년이 동아리 선배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야 하고, 3학년들이 여러 명 걸어가며 길을 막고 있자 그 사이를 비집고 지나간 1학년에게 버릇없다는 평을 한다고.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우리들이 다음 세대에게 어떤 문화를 전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선배님’과 ‘교수님’을 거역하기 어려운 대학 사회, 서열로 호칭을 정리하며 시작하는 TV토론회, 독자에게 반말하는 친근한 예수와 존댓말을 하는 겸손한 예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성경 번역 문제. 모두가 평등한 언어로 동등한 위치에서 교류하던 관계가 ‘한국어’ 앞에만 서면 근본적인 방향을 잃는 현실을 보여주는 예이다.
호칭 문제도 한국어 존대법의 연속선상에 있다. 한국 언론은 '일반' 사람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호칭을 달리한다. 권력자의 직함을 생략하지 않고 반복하는 호칭법은 그 자체로 차별일 뿐 아니라 차별을 강화하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한국 언론은 한국의 대통령과 외국의 수장을 호칭으로 차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 책에서는 ‘박대통령-시진핑, 한중 정상회담서 무슨 얘기할까’ 같은 신문 기사 제목을 예로 들었다. 영어권 언론에서는 President OO라고 기사의 처음에만 밝힐 뿐, 다음부터는 Mr.OO로 또는 OO로 호칭한다.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조직의 윗사람을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사장님’, ‘팀장님’처럼 직함과 함께 ‘님’을 반드시 붙여야 한다. 최근 발생한 네이버 직원 사망 사건은 한국의 IT기업이나 외국기업에서 시도하는 수평적 호칭 문화가 얼마나 허울뿐인지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공식적인 업무 시간이 끝나거나 회사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다시 ‘예의 바른’ 한국형 호칭으로 곧장 되돌아오는 경우도 다반사다. 심지어 형님-아우, 언니-동생이 되어 끈끈하게 결속력을 다지며 ‘의리’를 부르짖기까지 한다. 의리는 한국형 비리의 시작으로 변질될 때도 많다. 특수한 반말이 가져오는 한국형 폐단이다.
공손함을 넘어 상호존중으로
취학 전 아이들에게 존댓말 쓰기를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강요했던 게 맞다. “네”라고 답해야 한다고 했고, “아니요”라고 할 때는 공손하고 완곡하게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예의라고 알려줬다. 이 체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가족이 함께 책모임을 하면서부터였다. 자유롭고 편안해야 하는 책모임에서 아이들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가족 모두 존댓말을 써보기도 했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서로 반말을 주고받던 남편과 의도적으로 존댓말을 하는 것은 인식과 표현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때가 더 많았다. 결국 우리의 선택은 책모임뿐 아니라 모든 일상생활에서의 ‘무례하지 않은, 친근한 평어’를 쓰는 것이었다.
반말과 평어는 형태는 같지만 대화 당사자들이 서로 위아래를 따지는가의 여부로 그 성격이 달라진다. 반말은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을 뜻하며, 평어는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 가까운 관계에서의 친근한 말이다. 비록 우리 가족 내에서만 통용된다는 한계는 있지만 중국 아이에게 화를 내던 여섯 살 한국 아이처럼 서열과 위계를 의심 없이 학습하는 것은 멈춰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한국어가 ‘평등한 언어’로 변모하도록 대안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상호존대’의 평등어이다. 모든 사람이 ‘-요’를 사용하는 동시에 윗사람에게만 사용했던 ‘-께서’와 ‘-시’를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다. 윗사람들이 아랫사람과 똑같은 높이가 되는 것을 견딜 수 있느냐가 이 방법의 한계다. 두 번째 방법은 ‘평어’ 사용이다. 모두가 친구처럼 평등한 관계에서 나누는 ‘평어’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존대법을 쓰기 위해 상호 높낮이를 계산하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 역시 윗사람들이 받아들이느냐가 문제다. 거듭 말하지만 위아래를 지키는 것만이 예절은 아니다. 서열이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나라가 인간의 도리와 예절을 잘 지키며 살아간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언어는 그 언어가 전달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언어가 반드시 전달해야 하는 것에 의해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_24쪽
앞으로도 우리는 "영어로 대화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위아래를 계산하게 만드는 습관화된 존대(233쪽)"를 후세대에 전달할 것인가. 21세기 민주사회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평등하게 교류하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상호존대’를 이루고자 한다면, 생각 없이 사용하던 "존대법의 양태를 우리의 의식 위로 끌어올려 살펴보아야 할 때(233쪽)"가 되었다. 무의식적인 서열 문화에서 의식적인 상호존중 문화로 변화를 꾀하며, 비민주적인 한국어가 평등한 언어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책,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