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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 Jan 04. 2020

[날적이] 합격 기원등의 악몽

진심은 언젠간 닿는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불교재단이었다.
해마다 수능이 다가오면 고3과 고1을 짝지어 고1이 고3에게 대학합격기원등을 만들어 주는 전통이 있었다.
6월 부터인가? 본격적으로 미술시간에 등을 만든다. 손재주가 없던 나지만, 나름 열심히 예쁘게 만들었다. 물론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들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부디 이 소원등의 주인이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마음은 그 누구보다 컸다.

(+나는 프로 오지라퍼다.)


그렇게 내 손을 거쳐 완성된 기원등이 수능 100일을 앞두고 학교 운동장에 걸렸다.

대망의 첫 점등식 날,
해가 지고 깜깜한 저녁 시간은 (고3에 비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쪼물쪼물 만든 합격기원등이 가장 밝게 빛나 보이는 시간이다.

석식 후 주홍빛 소원등 앞에 고3 언니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선생님 몰래 숨겨놨던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친구끼리는 서로의 소원등에 장난기 가득한 혹은 진심이 담긴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또 한 쪽에선 소원등을 두고 품평회를 열었다.
“니가 더 예쁘네~ 내가 더 예쁘네~”, “만들어 준 후배한테 문제집 잔뜩 물러줘야 겠다.” 등등
자신들의 소원등을 보고 만족해 하며 뿌듯해한다. 마치 등이 예뻐야 수능이 대박난다고 믿는 듯했다.

나는 나를 위한 합격 기원등은 아니지만 내가 만든 것이었기에 궁금했다. 사실 낮에 봤을 땐 실물이 별로였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아무래도 조명발을 받으면 좀 더 낫지 않을까 싶어... 친구와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하필 나의 짝선배 고3 언니가 친구들과 자기 등 앞에 몰려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먼저 인사를 하려고 하는 순간..
“아 짜증나. 내 등은 왜 이따위야~~!!”
언니는 불같이 화를 냈고 친구에게 투덜댔다.
그 언니의 친구들도 꺄르륵 웃으며
“뭐 그렇게 나쁘진 않는데~왜~”하며 비꼬듯 언니를 놀렸다.

옆에 같이 있던 친구가 먼저 헉 하고 “괜찮아?”물어봤다. 괜찮다고 했지만 하나도 안 괜찮았다.

사실 소원등이 완성되면 고3 언니에게 직접 가져다 준다. (등만 주는 게 아니라 초콜릿, 과자 등 간식도 바리바리 챙겨서 말이다..)
돌이켜보니 그때 언니 표정이 별로였던 것 같다.
그리고 예쁘단 말은 없었고 “고생했어~”가 전부였던 것 같다.

아 그런 의미였구나. 실망한 거 였구나. 뒤늦게 언니의 반응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거였다.

하지만 속으론 섭섭했다.
대충 만든 게 아닌데.. 그냥 재주가 없던 것 뿐인데..
그 언니는 대체 내게 뭘 기대한 건가 싶기도 하면서 서운했다.

그 시간 이후 야자를 하는 내내 하교를 하면서 언니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아 아무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야식 뭐 먹지? 치킨 시켜달라하면 엄마가 살 찐다고 구박하겠지? 동생이 내 자두 몰래 먹은 거 아냐??' 와 같은 사소하지만 쓸 데 없고 행복한 고민을 했을 텐데)
무엇보다 정말 소원등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서 언니가 '나 때문에' 대학에 떨어지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걱정 만수르다.)

집에 오자마자 라디오를 크게 틀고 엉엉 울었다.

애가 학교에서 오자마자 눈물 바람이니 엄마와 아빠는 전전긍긍했다.
친구와 무슨 일 있니? 공부가 안 되니? 등등

결국, 그 날 있었던 사실을 털어 놓았다.
아빠는 "에이 난 또 뭐라고~"하며 줄여뒀던 tv의 볼륨을 다시 올렸고
엄마는 눈물을 닦아 주며 호호 하고 웃었다.
그리고 “부처님은 가장 초라한 등을 먼저 둘러보신단다. 오히려 좋은 거야~” 라며 위로해줬다.

그 말을 듣고 다행이다...라는 생각 보다
“엄마가 봤을 때도 그 등이 이상했단 소리야~~~ 엉엉엉”하며 되려 화풀이했다.

겨우 진정하고 그 언니에게 마음을 가다듬고 새벽에 문자를 보냈다.
자세히는 기억 안나지만 엄마가 했던 말을 인용해서 보냈다.
예쁘게 못 만들어 죄송하지만 신이 언니의 소원을 먼저 들어줄 거라고...
하지만, 언니에게 답장은 없었다..
(아마 바빴을 것이다. 아니면 ‘이게 더 엿 먹이네?’라고 생각했을 수도...)
사실 답장이 신경 쓰일까봐 문자를 보낸 후 전원을 꺼놓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 보니 친구에게 온 문자 밖에 없었다.

이후, 언니는 언니대로 코 앞으로 다가온 수능 때문에 바빴을 것이고 나도 이과로 진학하냐, 문과로 진학하냐를 두고 진로 고민에 빠져있던 터라 서서히 '합격 기원등의 악몽'은 잊혀져 갔다.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흐른 후 수능 전날
고3 언니들은 수능응시표를 들고 배치 받은 학교로 사전답사를 가는 날이다. 그리고 그런 언니들을 배웅하기 위해 고1,2 학생들은 운동장부터 대문까지 일렬로 서서 박수를 치며 응원한다.
고3들은 이제서야 수능이 실감 나는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후련함에 환히 웃기도 했다.
고2들은 자기들의 미래 모습이라며 겁을 먹었다.
고1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 그저 집에 빨리 가고 싶었다.
하염없이 박수를 치던 순간, 나의 짝언니가 친구와 팔짱을 낀 채 내려오고 있었고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은정아!!"

"아...언니.. 수능 잘 보세요! 화이팅"

"고마워. 그리고 등 예쁘다~!!ㅋㅋㅋ수능 끝나고 한 번 보자~"

'칫. 언니 진심 다 알거든요. 다 들었다고요.'
하며 꽁해있었다.
하지만 언니의 말에 꽁 얼어 붙었던 마음이 스르륵 눈녹듯이 사라졌다. 뻔한 거짓말인 줄 알면서말이다. 그리고 다시 마음 속으로 언니의 수능 대박을 빌었다. (+나는 줏대가 없다.)

수능 후 언니는 진짜 나를 찾아 왔다.
각종 문제집과 간식들을 가득 들고 왔다.
그 날은 특별히 급식을 안 먹고 언니가 몰래 시켜준 신전떡볶이를 먹었다.
언니는 입학이 얼마 안 남았으니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며 한 입도 안 먹었다.
(나는 아직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며 스스로 위안하며 마음껏 먹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열심히 먹고 있다.)

"은정아 나 @@학교 수시 합격했어!!"

"헐 언니 축하해요. 대박이다.."

"진짜 네 말이 맞나봐??"

"네....?"

그 순간, 내가 언니한테 한 말이 있나?싶었는데..

"그렇다고 진짜 만든 게 이상하다는 건 아니구..그냥 그렇다고 하하하하"

난 언니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만든 등이 못생겨서 보잘 것 없어서 신이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에요. 나도 내 일은 아니지만 간절히 빌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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