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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외의 Jan 05. 2022

유럽 여행 출산기

여행은 아쉬움을 낳고, 키워서 성장 시킨다.



떠나기 열 달 전, 런던 히드로 공항을 거쳐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왕복 티켓을 구매했다. 티켓 값은 71만원 정도. 과거의 내가 모은 돈으로 티켓을 샀으니 여행 경비는 미래의 내가 벌어야 했다. 취소 수수료로 헛돈을 날릴 순 없었다. 오로지 목적 하나, 여행만을 품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급을 탈 때면 미리 도시마다 숙소를 잡거나 기차를 예매했다. 출국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여행의 형태는 선명해졌다.


나도 몰랐던 탁월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악명 높은 3:4:3. 이코노미석, 창가 좌석에서 비행 운행 시간 12시간 동안 화장실 한번을 가지 않았다. 돈이 없어 기차 대신 택했던 8시간 내리 달리던 버스에서도 내 궁둥이는 기다려 훈련이 잘된 강아지처럼 얌전했다. 이것만으로 청춘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사람의 능력도 자원이 한정된 것인가. 유럽 여행에서 내 인생, 엉덩이의 참을성을 다 써버린 느낌. 지금은 기차에서 2시간 이상 앉아있으면 기차 화통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울화통 터지는 소리겠지. 그러므로 ‘하나 있다’가 아닌 ‘있었다’로 과거형이 되었다.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해 비교적 늦게 나온 내 캐리어를 찾아 들었다. 블로그로 열심히 찾아봤던 공항에서 숙소 가는 길은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돌려봤기 때문에 무탈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혼자 체크인이 처음이었는데 능숙한 척하던 나는 귀여웠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그 시간의 거리는 노란 햇살 대신 노란 조명이 가득했고, 낮과 다른 분위기로 활기찼다. 무서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만 너무나도 낯설 뿐. 그 중, 시각도 청각도 아닌 후각이 가장 먼저 낯을 가렸다. 묵직한 바닐라 향이 너무 싫어서 찡그린 미간을 펴대느라 고생했는데 지금은 사서 맡는다. 당시엔 커피도 안 좋아했다. 세계 3대 커피에 든다는 로마의 어느 카페에서도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았고, 담백한 식사 빵보다 다디단 디저트만 좋아해 프랑스 바게트와 크루아상을 한 입도 먹어보지 않았다. 취향이란 건 바뀔 수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모를 일이니, 사람이든 어느 것이든 마음을 여는 편이 좋겠다고 이 순간 다짐한다.


나는 여행 내내 소박했다. 웅장한 성당에서 두 손 감싸 모을 때도 분수에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빌 때도 단 한 가지만 빌었다. 이 순간, 이 감정을 오감으로 기억하게 해달라고. 아주 오래오래. 잔디밭에 누워 에펠탑을 보다 별똥별을 봤던 천운의 찰나에도 저 소원을 빌었다. 치매가 걸린 것도 아니고 어련히 잘 기억 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어쩌면 이 여행으로 비롯해 마음속에 커다란 한 획이 그어지길 바랐던 거 같다.


여행하면서도 인생 마지막이 될 듯한 여행지와 다시 올 거라고 스스로 새끼손가락 걸어보는, 알 수 없는 우애와 믿음이 생기는 곳이 있었다. 베네치아는 가기 전날까지 가고 싶지 않던, 교통 편의상 억지로 끼워 넣은 도시였고  떠나던 기차 안에서 뜨거운 눈물을 훔치게 만든 유일한 도시이기도 하다. 미움을 사랑으로 돌려받는 느낌을 감정 공유 불가능한 무생물에 느낄 수 있다니. 다시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베네치아는 작별 인사 대신 노을로 껴안아 주었다.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도시에서는 더욱 힘주어 걸었다. 하물며 비둘기에게까지도, 도시의 모든 것에 애정의 시선을 주려 했다. 그리고 길게 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이니까. ‘영원히 안녕’


열 달간 품은 여행이 낳은 건 아쉬움이었다. 모순이게도 가장 완벽한 여행이란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 아닐까. 머리 위에다 선글라스를 꽂고 (열심히 꾸민) 촌스러운 스타일과 태평하게 올라간 광대, 빵빵한 볼살이 밉고도 애틋하다. 아쉬움으로 비롯된 스무 살 초반의 기억은 성장해 서른이 된 나를 다시 헤집게 만든다. “다시 가면 도시마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한 끼씩 먹을래. 아침 일찍 노천카페에서 크루아상이랑 에스프레소 한 잔 시키고 책 읽고, 아침 조깅도 해볼래.” 다시 간 여행에서도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후회 가득 담아 돌아올 거다. 꼭.





얼마 후 기차가 도착했다. 나는 기차에 올라탔다. 내가 남겨두고 온 것들을 향해 다시 떠났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행기에 올랐고, 담담하게 내가 떠나온 것들을 다시 맞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특별할 것도 없이 평범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추슬렀다. 내가 나인 것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런 것을 위해서 나는 떠났던 것이리라

책 <온전히 나답게> 한수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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