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이었다_ 002
오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참 뻣뻣한 사람이었다. 신입사원이던 시절부터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위주로 했기에, 굽히고 숙이는 법을 더욱 배우지 못했다. 선배들에게도 살겁거나 부들부들한 후배가 아니었다. 타고난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게 나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며 살아왔고, 그 딱딱함과 뻣뻣함은 시간이 갈수록 견고해졌다. 만약 지금의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어린 후배를 팀원으로 맞이한다면, "인간이 저렇게 껄끄러워서야 사회생활 어떻게 버티냐..." 하고 고개를 내저을 인간형이 그때의 나였다.
어디에서든 자신을 굽혀야 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한편 "나는 절대 영업직은 되지 말아야지, 내 성향에는 절대 맞지 않는 일이야"라는 다짐을 수없이 반복했다. 편협한 생각들은 스스로를 점점 더 융통성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갔고, 독립이라는 걸 하고 보니, 이 딱딱하고 까칠한 태도는 나의 생계마저 위협할 수 있는 큰 이슈가 되었다. 영업이라는 것, 달리 말하면 누군가를 다독이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 나의 홀로서기에 큰 과제가 되었다. 그래도 함께 일을 하는 대상이 기업체의 담당자일 때는 대화가 한결 수월했다. 내가 "을"치고는 많이 꼬장꼬장하긴 해도, 서로 간에 사무적인 친절함에 익숙한 사람들끼리 적정한 매너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쉬운 편에 속했다.
문제는 어떤 마인드를 가졌는지 모를 개인들을 상대할 때 발생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말을 걸어왔고, 나의 까칠하고 사무적인 태도가 거슬릴 때면 면전에서 불만을 터뜨리거나 싸움을 일으켰다. 물론 이런 불쾌한 상황이 자주 발생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대체로 예의라는 걸 배운 사람들이니까. 불편한 상황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도록 훈련된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굳이 세어보자면 열 번에서 스무 번 중 한두 번 정도? 나는 '진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마음을 다치는 사건들은 아주 작은 확률로 벌어질 뿐 대부분의 초면인 개인들은 대체로 배려가 깊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는데도, 나는 금세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온라인 상에 번호가 오픈된 업무용 핸드폰에서 처음 보는 번호가 수신될 때마다,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번 벌어질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미리 걱정하느라, 심장이 두근거리고 초조함에 혀를 깨물게 되었다. 도무지 불안한 감정이 가라앉지 않을 때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고, 어느 정도 진정될 때에는 조심스럽게 수신 버튼을 누르는데, 거의 대부분은 아무 문제가 없는 용건들로 밝혀진다. 그럼에도 아주 드물었던 나쁜 경험들이, 낯선 번호와 낯선 목소리 앞에서 나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미리 불행한 상황을 예측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무서운 일이었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진심으로 역지사지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껏 무슨무슨 고객센터나 상담센터 담당자들과 수도 없이 통화를 하면서 그들을 대하는 내 태도와 목소리는 어땠을까. 무언가 문의를 하거나 클레임을 걸고자 전화를 하는 경우에 기분이 막 날아갈 듯 즐거운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굳이 전화를 하는 이유는 문제를 호소하거나, 해결을 요구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하는 대로 불편이 해소되지 않았을 때, 나는 목소리로만 대화하던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던가. 생전 처음 대면하는 그들에게 어떤 얼굴이었던가. 그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얼마나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끼고 있을까. 반복적으로 겪는다고 해서 과연 무뎌지는 일일까?
수도 없이 여기저기로 전화를 돌려대는 상담 시스템에 짜증이 치솟고, 그건 담당자가 아니라서 답변할 수 없다는 말에 실망하고, 원칙상 불편과 불만을 해소해줄 수 없다는 말들에 분노했던 나를 크게 반성하게 되었다. 나는 절대적으로 매너를 지키면서 말했고, 소비자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요구를 했을 뿐이며, 불편을 겪게 한 그들의 준비가 부족했던 것을 지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매우 싫어졌다.
나는 때때로 꼰대냄새를 심하게 풍기는 진상이었다.
반대편의 입장에서 두려운 경험을 여러 차례 거치고 나니, 뻣뻣했던 나의 태도가 조금씩 유들유들해지기 시작했다. 일부터 그런 태세를 취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나의 말과 행동에는 상대방의 입장이 묻어났다. 보내야 할 제품을 잘못 배송해서 구매자에게 온갖 클레임을 대신 받게 한 담당자에게, 나는 이전처럼 잘못을 지적하고 추궁하지 않게 되었다. 수없이 물건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정신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사정으로 미리 배송 완료를 눌러두고 다음날 슬쩍 박스를 가져오는 택배기사님을 향해 그저 반갑게 인사하게 되었다. 딱딱했던 마음의 이완이 이렇게 나를 편안하게 해 줄 줄 몰랐다. 간장 종지 같던 나의 작은 그릇을 이렇게 넓혀주고 키워주는 물레가 될 줄은 몰랐다. 조금은 말랑해진 나의 태도의 변화가 스스로 느껴질 때마다 새삼 뿌듯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낯선이 와의 대면에서 느끼는 감정을, 이제 나는 훨씬 크게 받아들인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바보 같은 실수를 연발하며 미숙함을 보였는데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럴 수 있죠." 하며 격려해주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울리는 작은 감동을 받은 뒤로, 나도 모르게 다른 이들에게 그런 마음으로 대하고 있었다. 작은 것이라도 받으면 어떻게든 더 크게 돌려주려고 애쓰게 되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타고난 엄격하고 예민하며 냉정한 성향이라는 것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이런 바람직한 섞임 이 매우 반갑다.
"아니, 이런 걸 굳이 겪어봐야 깨닫나? 타인을 향한 이해심 정도는 성장기에 탑재하는 거지."라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사람 관계의 원리를 일찌감치 터득하고 좋은 인성을 갖춘 당신에게 축하와 부러움의 박수를 보낸다! 나도 나를 몰랐는데... 나는 오랫동안 그런 사람이었다. 원칙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편협하고 오만한 꼰대였다. 상당히 예의 바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따지기 좋아하는 진상이었다. 그래도 뒤늦게 깨우치면 더 크게 받아들이고 더 오래 간직할 줄 안다고 하니, 그런 면에서 위로를 얻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