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말을 고르는 것은 옷매무새를 단정하는 것과 같아서
중요한 일임이 틀림없을 테지만 괜스레 어렵기도 해.
너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이
잔뜩 찡그린 모습이 아니라,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었으면 해.
너의 위로를 그리며 맺은 관계 속에서
결코 다정한 말 하나 듣지 못하게 된대도
또 그 이유가 너의 부덕함이 아니라
솔직하지 못한 나로 인한 것이더라도
우리는 서로 아무 말하지 않기로 해.
어느 밤부터였을까.
낮부터 이어진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너를 그리고 생각하며 꿈꾸었어.
우리의 날들이 이대로 쭈욱 이어져
어딘가 내가 모르는 그런 환상적인 곳으로 데려가 주길 기대하기도 했던 것 같아.
어느 밤, 그 몇 번 정도는 말이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꿈에서 깨어지더라.
네가 하는 사랑의 말들이, 그저 지금 이 순간에만
속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같은 것 말이야.
늘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만 배워와서
쉽게 쉽게 하지 못하는 내가
이제 모든 것을 어렵게만 하는 사람이 된 걸까.
너를 보고 싶다 생각했다가도
곧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그래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어.
너를 생각하는 수많은 시간들을 이어 붙이면
그건 그것대로 내 삶의 전부가 돼버릴 것 같은 사실이 두려워.
지금 나라는 사람을 자르면 온통 너만 흘러내릴 것 같은 기분이야.
붉은 피 대신 분홍 빛 달달한 너만이 내 몸을 흐르고 있고, 생명을 주고 있어.
이대로 다 괜찮은 걸까. 좋은 걸까.
너에게 아무 말하지 못하는 현실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만큼
무엇도 말하지 않고, 그래서 기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실망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차갑지만 역시 좀 더 끌리는 쪽이야.
나에 대해서 모르는 네가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섭섭함보다는 안정감이 더 큰 것도 같아.
나를 좀 더 꽉 안아줘, 내가 도망치지 못할 만큼.
아니 너 스스로 그렇게 판단해 버릴 만큼,
그러면 나는 아무 일 없듯 가볍게 너를 도망쳐볼게.
안달 난 너는 나를 붙잡으려 쏜살같이 뛰어오고
나는 달아나지지 않기 위해 도망치는 거야.
우리의 추적기는 그렇게 계속 계속 이어져,
너와 나의 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이어지고
우리는 결말을 맞는 거야 언젠가 말이야.
그러나 슬프지만은 않을 거야.
줄곧 바라왔던 대로 우린
변하지 않는 채 서로의 마지막을 볼 테니까.
손을 잡고 있는 상태일까, 그러니까 붙잡힌 상태일까
아니면 여전히 쫓고 쫓기는 상태일 까는 모르지만은
어느 쪽이든 의미 있을 거야.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는 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