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런데 지금 내 속에 있는 건 전부 불필요한 말들 뿐이에요. 아주 오래됐지만 털어 낼 필요는 없는 거요.
왜냐면 이야기해봤자 어차피 달라지는 것도 없고, 괜한 감정의 거리만 만들어내는 것들이라서요.
.. 당신이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적어도 아직까지는요.
그러니까 서운하다고 말하지 마요. 그런 말을 들으면 진짜 내가 너무 서운해지니까."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죠. 내 속에서부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부다 숨김없이 드러낸다라는 거.. 진짜 황홀한 일이잖아요. 나를 온전히 모두 받아들일 상대가 있다는 거요. 그런데 그게 다 꿈이고 환상이더라고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적어도 이 세상엔 없고, 교회나 절 뭐 그런데 가면 비슷한 게 있긴 해요. 실체는 없지만..
결국 모든 게 자기만족인 걸까요. 상대가 내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고 믿는 것도, 상대가 나의 모든 걸 받아주었다는 것도.. 우린 환상 속에 빠져 사는지도 몰라요. 내가 믿는 것들이 진짜 현실이라 착각하면서요. 그리고 마침내 그 경계가 부서지기 시작할 때, 그 파편에 상처를 입게 되는.. 익숙하고도 안쓰러운 결말로 우린 나아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지금 내 마음이 그래요. 모두 알았던 것 같은 그 사람에게 생전 처음 보는듯한 말을 들었을 때, 난 너무 공허해졌어요. 그 순간은 어쩌면 우리의 처음과 비슷했어요. 그가 사랑한다는 말을 했던 때,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그림자가 날 덮치는 때처럼요. 끝이라는 건 어쩌면 그렇게 처음과 비슷하게, 아니 처음부터 그렇게 그의 안에, 나의 안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나라는 사람의 조각들을 가장 많이 가져간 사람이었으니, 내가 느낄 아픔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다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로는 요. 전부는 아니지만, 그 사람보다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만큼.."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대체 왜 살아가는 걸까요. 죽음을 생각하는 때만큼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없는 거 같아요. 감히 왜 살아가는지도 모르면서, 죽음을 거부하는 마음이라니 참 아이러니하죠. 그건 살아가야만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강한 믿음일까요, 아니면 단순한 본능일까요.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말이 어느 때에는 참 와 닿던 말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덧없게 느껴져요. 꼭 행복해야 하나 생각도 들고, 행복이란 건 도대체 뭔지, 삶이란 건 도대체 뭔지..
신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내게 주어진 질문들이 너무 과분하고, 그 답이란 것의 존재가 너무 신앙적이에요. 그 해답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른 채로 그저 계속 살아가야 한다라는 것은 어떤 과제나 징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일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살아가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될지, 그런 것이 있기나 할지 난 잘 모르겠어요. 그가 떠난 지금 나는 최대의 희생자처럼 굴고 있지만, 실은 알아요. 아무렇지 않게 또 살아갈 거라는 것을.. 나는 약았고, 그래서 잘 알죠. 이 순간의 상실감이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나 스스로도 결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은 역시 그만 둘 수가 없겠네요. 아직은 좀 더 살아봐야겠어요. 답을 내는 것에 안달하지 않되 충분히 계속 고민해나가면서 가야겠어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길만큼 초조하고 불안한 건 없으니까. 그래도 뭔가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