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키 Jan 03. 2018

스웨덴에서의 첫 공부

석사 첫 학기, 첫 period를 마치며

8월 28일부터 시작했던 이번 과목이 10월 30일에 끝이 났다.
두 달 동안 단 한 과목 밖에 공부하지 않았지만, 내가 느낀 스웨덴의 (어쩌면 유럽의) 공부 방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 번에 하나씩

  스웨덴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가장 놀랐던 점은 한 period에 한 과목씩 공부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공에 따라 한 학기 내내 한 과목(엄청난 학점짜리)을 들을 수도 있고, 한 period를 쪼개 두 개를 들을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 과는 큰 변수가 없다면(선택과목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다) 한 번에 하나씩 배우는데, 덕분에 깊이 있게 한 과목을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다.
  이번에 들은 과목은 Designing for User Experience였는데 주 교재와 몇몇 논문을 중심으로 읽고 토론(이라고 하기엔 뭘 배웠나 문답하는 정도지만..) 하고 각각의 파트에 기반을 둔 팀플을 하고, 맨 마지막에 큰 시스템을 하나 디자인하는 팀플로 마무리하였다 (아, 각각의 팀플에 대한 개인 보고서도 있다.. 지금 이거 하기 싫어서 블로그 글 쓰는 중..). 중요한 건 시험이 없었다. 스웨덴 친구한테 이렇게 시험 없는 과목이 많냐고 물어보니 대부분 시험은 본다고 한다. 이번 과목은 실제적인 디자인 프로세스를 체험하고 관찰하고, 만들어 보고, 테스트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더 중요해서 그런가, 팀플 밭이고 시험은 없었다. 팀플은 학부에서 했던 팀플들과는 느낌이 좀 달랐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루려고 한다.
  한 번에 한 과목씩 수업을 들으니 사실 페이스는 많이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것도 과목마다, 전공마다 다르니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오히려 나 같은 영어 울렁증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충분히 읽고, 단어 찾고, 해석하고, 검색할 시간이 되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은 다시 구글에서, 다른 논문이나 책에서 찾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되었고, 심지어 친구에게 물어보고 다시 찾아볼 시간까지 있었기에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전공에 영어로 되어있는 개념들을 정립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심지어 간간이 디너파티를 다닐 여유까지..)
  한 번에 여섯 과목을 돌리며 팀플과 개인과제, 시험에 치이던 학부 때와 너무나도 다른 일상을 살고 있어서 종종 내가 너무 나태한 건가 뭔가 더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 가지를 깊이 있게 파는 과정에서 '아 내가 공부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은 제대로 받고 있다. 사실 웃긴 점은 독일 친구도 이 느리디 느린 페이스에 놀랍고 기쁘다고 표현하는데, 독일에서도 동시에 대여섯 과목을 돌리며 학교에 매일같이 붙어있어야 했었는데 매일 학교에 가질 않으니 느낌이 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팀플.. 이렇게 해도 돼?

  첫 코스에서는 3개의 작은 팀플, 큰 메인 팀플, 각 팀플별 보고서(총 4부)로 과제를 마쳤다. 결국 팀플만 하다가 한 과목이 끝난 느낌이다. 근데 이 팀플들이 이전에 내가 했던 팀플들과는 느낌이 좀 달라 같이 나누려고 한다.

Brain Storming * ∞

  각 과제에서 브레인스토밍이 차지하는 비율이 거의 70%가량 되는 느낌이었다. 다섯 명이 둘러앉아서 각자 커피 홀짝이고 중간에 화장실 다녀오고 매점 가서 샌드위치 사 오면서 세 시간은 훌쩍 지나고, 별의별 이야기를 다한다. 맨 처음 어색하게나마, '하하, 이 주제와 관련돼서 생각한 거 있니?'로 시작하지만 어느새 주제와 관련된 자기 경험, 타인의 경험 그리고 주워 들은 문헌의 정보까지 긁어오고, 그러다가 샛길로도 많이 샌다.

그 얘기가 왜 거기서 나와...?

이 샛길로 새는 시점에서 속으로 짜증을 몇 번 내기도 했다. (아니 팀플 하다가 컴퓨터, AI 의 영혼설까지 나왔다. 그 뒤로 주제가 심각해지면 '댓 스피릿츄얼 띵'이란 농담까지 하며...) 배도 고픈데.. 왜 이런 얘기로 시간을 낭비하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집중을 잃어가곤 했다. 처음 몇 번 그렇게 정신이 혼미해지니 나중엔 점차 적응도 되어갔다. 그리고 첫 팀플의 보고서를 쓰며 마무리하는데.. 그 쓸데없을 것 같은 브레인스토밍에서 참고 자료로 찾아볼 수 있는 것들, 새롭게 배운 점 그리고 다음 연구를 위한 제언의 요소들이 숨어있었다. (물론 스피릿츄얼 띵은 아무 도움이 안ㄷ...)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전 강의 또는 읽기 자료에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서로 나누고 설명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어서 전체적인 학습의 마무리이자 시작인 시점이 되었다. 이제는 팀플 회의를 한다 싶으면 샌드위치를 더블로 싸서 몇 시간이고 앉아있을 수 있는 상태를 준비하고, 주제랑 상관없는 이야기도 즐겁게 들으며 종종 받아 적는다.


그렇게 하면.. 점수 안 나올 텐데;;;
  팀원들과 주제를 선정하면서 나 혼자 당황했던 적이 있다. 현실 세계와 가상의 세계가 함께 있는 시스템을 선정해서 분석하는 과제였는데, 20분간의 회의가 끝난 후 우리는 '구글맵'을 선정했다. 굉장히 좋은 시스템이어서 모든 팀원이 이를 떠올린 팀원에게 찬사를 보내고 저마다의 생각을 던지는 상황이었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구글 맵은 너무 좋은 시스템이잖아..'라는 생각뿐이었다. 다시 말해 '깔게 없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전까지 '문제점' 분석과 개선방안을 구안해내는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이런 접근 방식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미심쩍긴 했지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이미 상황은 뒤집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나 외에는 모두 일말의 의심 없이 진행한다는 사실에 일단 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우리 팀은 '분석'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고, 개선사항으로는 그렇게 대단한 것들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그리고 대망의 발표날.. 교수님은 우리의 발표에 '좋은 분석'이라며 칭찬을 아끼시지 않았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굉장히 모호한 시스템을 잘 분석했다는 것이다.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시스템을 '까고' 개선사항을 이끌어내는 위주로 분석한 팀은 없었고, 분석 과제인 만큼 분석 그 자체에 집중하였다.
  점수가 얼마나 잘 나올지 고민하는 발표가 아니라 정말 이 팀플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학습했는가 확인하는 발표였고, 새로운 방식의 공부를 제대로 느끼고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조건적으로 용어와 개념을 외우고, 교수님과 교재의 이야기가 바이블이 아닌 내 옆에 앉아있는 동료, 인터넷에 떠도는 비디오, 심지어 나 자신이 교수자가 되는 수업. 이런 수업이 내가 스웨덴에서 경험한 첫 과목이었다.

  여담이지만, 첫 시간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이 책이 이번 과목의 주 교재입니다. 이 사람이 이 분야에 큰 업적을 세웠지만 몇몇 부분은, 그리고 여러분을 가르치는 나도 정말 바보 같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 부분마다 끼어들어 여러분의 의견으로 채우길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거기서 그 공부를 하는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