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네 한 달 살기, 18일째
오늘로 무이네에서 보낼 날들의 절반이 지났다, 라고 써두었다가 그로부터 또 사흘이 지났다. 한 달 살기 기록을 애초에 왜 하려 했는지 거추장스럽다. 글 쓰는 게 가장 재미있던 시절은 정말 끝났구나. 호텔과 앞 바닷가, 근방 도보 30분 거리를 거의 벗어나지 않으며 생활하고 있는 나로서는 매일이 비슷하다.
바다만 매일 달라 보일 뿐이다. 가끔 바다 풍경을 보면 파라다이스, 라는 말이 툭 튀어 나올 때가 있다. 날씨는 변덕스럽지만 요 일주일 간은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그러다가도 먹구름이 깔리고 비가 내리곤 한다만 보통 해가 지고 난 뒤 일이다. 무이네 와서 이만큼 쭉 날씨 좋은 시절은 처음이구나.
일주일 전부터 한쪽 귀 상태가 안 좋아 수영을 자체 금지했다. 염증 약을 놓고 며칠 쉬다 괜찮아진 것 같아 물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탈이 나서 고생했다. 코앞에 바다를 두고 수영을 못한다니, 베트남까지 와서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물론 바다에서는 수영을 한다기보다 둥둥 떠 있는 정도지만 어쨌든 귀에 물을 먹게 된다. 그러다 수영 대신 바다에서 할 수 있는 더 즐거운 일을 찾아냈다.
바닷속에서 춤 추기!
무이네 바다는 수심이 정말 오래 얕다. 해변에서 50m? 넘게 들어가도 물이 가슴팎까지만 온다. 안정적으로 땅에 발을 디디고서도 망망대해 나 혼자인 듯한 기분이 든다. 어쩌다 바다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몇 있거나 바구니 배가 두어 척 떠 있거나 할 뿐, 바다는 거의 텅 비어 있다. 요 일주일 간은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서 맘대로 몸을 흔든다. 몸 가는 대로 추기도 하고, 한국무용, 발레, 요가 동작 같다고 생각되는 걸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춰 해본다. 우아한 김연아가 된 듯한 기분으로 혼자 난리 부르스를 춘다. 나는 어떤 춤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클럽 같은 데 가지도 않지만 어디서건 몸 흔드는 것도 남들 눈치 보느라 어려워하는 쭈구리일 뿐이다. 이곳에선 아무도 보고 있지 않으니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 출 수 있다. 초딩 때 가끔 음악 틀어놓고 거울 앞에서 혼자 춤추고 그랬던, 부끄러움 모르던 그 시절의 기분으로.
초등학교 1학년 때 전교생 소풍날에, 전교생 앞에서 나는 친구 하나와 같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장기자랑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그때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 생각해보니 이후로도 꾸준히 초등학교 5~6학년 때까지도 친구들과 당시 인기가요 춤을 연습해서 무대에 서곤 했다. 어쨌건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됐는데 언제부터 부끄러움이 생기고 그 사이 뭐가 달라진 걸까. 미국 위스퍼 광고가 '여성스럽게 뛰어보라'는 주문에 어린 소녀는 박력 있게 우다다 뛰고, 성인 여성은 손을 배배 꼬며 뛰는 모습을 대비하면서 제기하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데 딱히 비슷한 맥락은 아닌 것 같고.
바다에는 한낮 구름 없이 해가 쨍쨍할 때 참을 수 없어 뛰어들기도 하지만, 가장 황홀한 때는 해 지기 전이다. 산책 대신 바닷속에서 걷고 춤추며 해가 떨어질 때까지 바닷속에 머문다. 요 일주일은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물이 빛나고 흐르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지도 못하겠다. 해리 포터에서 마법사들이 기억을 펜시브에 꺼내놓을 때 나오는 은색 실들이 현실에 있다면 이런 질감일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드러운 천이 짜여지고 풀어지고 다시 짜이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 같다. 30년 넘게 살면서 해 떨어지는 바다에 몸을 담궈 본 적이 이전까지 없었다니, 그간 뭐했나 싶다. 마법 같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