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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쭝 브런치 Oct 26. 2020

다시 바탐방






    다시 돌아온 바탐방은 고향에 온 듯 편안했다. 차야 아파트는 아늑했고 집이 최고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며칠 후 이른 아침,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나는 차야 아파트 주차장으로 갔다. 곧이어 김쌤이 내려왔다.

   「어이, 반가워. 여행은 잘 다녀왔고?」

   「네. 잘 다녀왔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우린 몸을 풀면서 나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 했다.

    김쌤과의 마지막 라이딩은 캄핑 포이(Kamping Pouy) 저수지를 다녀오는 거였다. 구글 지도로 찾아보니 차야 아파트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차로 가면 한 시간, 걸어서 가면 일곱 시간이 걸린다고 나왔다. 대중교통은 없었다. 자전거로는 얼마나 걸릴까 궁금해 알아보니 돌아오는 답변은 ‘자전거를 이용할 수 없음’이었다. 왕복 80킬로미터. 우리는 자전거는 이용할 수 없다는 그곳을 향해 출발했다.

    갈 길이 멀어서 그런지 처음부터 부지런히 달렸다. 김쌤은 분명 자전거로는 초행길이라고 했는데 막힘이 없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껴 있어서 해는 피할 수 있겠구나 싶었지만 이내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는 점점 심해졌고, 흘러내리는 빗물 때문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나는 실눈을 뜨고 김쌤을 쫓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비는 그쳤지만 엉덩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종아리와 허벅지도 단단해져 쥐가 날 거 같았다. 비가 그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김쌤은 오히려 더 빨리 내달렸다. 내가 뒤에 있는 것도 잊었는지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리에 힘이 빠졌고 더 이상 쫓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몬둘끼리에서는 더 힘든 트레킹도 하지 않았던가. 나는 다시 힘을 냈다.  

    강쌤을 멈추게 한 건 도로를 점령한 소떼였다. 아무리 봐도 그들 사이를 통과할 틈은 없었다. 무리를 해서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기로 했다. 소몰이를 하는 청년들은 우리를 봤지만 길을 터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소들의 행렬은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더 길었다. 그 근방에 있는 모든 소들이 도로 위로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정말이지 엄청난 소떼였다. 결국 우린 자전거에서 내려 소들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잠시나마 쉴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고마웠다.

    하늘에 먹구름이 걷히더니 그 사이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안 가 길도 넓어졌다. 마침내 소떼 옆으로 틈이 생겼다. 우리는 그길로 빠져나와 다시 페달을 밟았다. 비도 그쳤고 잠깐 쉬어서 그런지 몸이 가벼웠다.

    목적지는 늘 느닷없이 나타난다. 그 길이 초행길일 때는 더욱 그렇다. 연극 무대의 막이 걷히듯 눈앞에 커다란 저수지가 나타났다. 하늘엔 무지개가 그려졌고, 저수지에는 연꽃이 둥둥 떠 있었다. 한국에 가면 떠오를 풍경이 하나 더 추가된 순간이었다.

   「이제 서른이라고 했지? 한국에 가면 뭐 할 거야?」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우선 정착을 해야겠죠.」

    서른을 앞두고 정착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정착에 대한 강한 의지가 생겼다. 굳이 서른이 되면 정착해야지 하고 정한 건 아니었는데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나는 20대의 절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그리고 한때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정착할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최근에도 남미 일주나, 유럽횡단 같은 장기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바탐방에 있으면서 이런 마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한곳에 머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외국에서의 삶을 동경했을까. 이방인으로 사는 게 좋아서? 삶이 여유 있어서? 하지만 잠시 머무는 것과 사는 건 다르다. 막상 살기 시작하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생존해야 하고, 가족, 친구들과도 보기 힘들어진다. 정서적 거리가 아닌 물리적 거리이기에 노력한다고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천천히 생각해봐. 이제 한동안은 또 혼자 라이딩을 하겠네. 그동안 재밌었어.」

   「네 저도요. 선생님 덕분에 많은 걸 경험했어요. 감사해요.」    



    귀국을 앞두고 나는 닥터 후와 마지막 점심을 먹으러 테레사에 갔다. 내가 먼저 도착했고 잠시 후 닥터 후와 멜빈이 도착했다. 오랜만에 닥터 후를 봐서 반가웠다. 이발을 했는지 머리가 짧아졌다. 멜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사이 얼굴의 주름이 더 짙어졌다.

   「멜빈은 곧 호주에 간대.」

   「갑자기요?」

   「응. 저번에 부러진 발목이 잘못됐거든.」

    멜빈이 발목을 보여줬다. 그는 다리를 곧게 뻗었지만 발끝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발목을 잘못 맞춘 상태로 깁스를 했던 것이다. 그의 발목은 심하게 돌아가 있었다.

   「어쩌다….」

   「발목을 맞춰준 의사가 산부인과 전문의였다고 하더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일이….」

    멜빈은 호주로 돌아가 수술을 받는다고 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과일을 사러 가자고 조르지도 않았고, 산부인과 의사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발목을 바라볼 뿐이었다.  

   「쏙은 그 후로 소식이 없었나요?」  

   「응. 그 남동생 머리가 엉망이었는데, 요즘엔 꽤 봐줄만 하더라.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미용실을 차리겠다는 말은 없구나. 매달 와서 돈만 잘 받아간다. 하하하.」

   「다행이네요. 별일 없이 잘 지낸다니.」

   「그건 그렇고. 있잖아, 우리 학교 기숙사에서 일하는 할머니 본 적 있던가? 그 할머니가 손자가 셋이 있거든. 그런데 그 손자들이 고아야….」

    그는 새로운 선행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쏙과의 일로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어려운 사람을 돕기 시작하다니.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다.


    차야 아저씨와 썸낭 아저씨에게도 작별인사를 했다. 차야 아저씨는 나와 제이가 떠난다는 말을 듣자 조그만 눈이 잠시 커지더니 이내 미소 지으며 우리의 앞길에 행운을 빌어줬다. 썸낭 아저씨에게는 노 네임 쌀국수 집이 너무 맛있어서 거의 매일 갔다고 했다. 아저씨는 무장 해제된 표정을 지었다.


    제이와 나는 화이트 로즈(White rose)에서 폴과 유미코를 만나 송별회를 했다. 화이트 로즈는 바탐방 펍 스트릿에 위치한 캄보디아 음식점인데 텅스텐 전구를 활용한 인테리어로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침 테라스 쪽 자리가 비어있었다. 은은한 황금빛 불빛 아래서 식사할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됐다.

    보통 메뉴판을 보면 그 식당의 수준을 짐작 할 수 있다. 메뉴의 가짓수가 많고, 미사여구가 넘치거나 주관적인 생각을 객관적인 것인 양 써 두는 경우에 맛은 별로일 확률이 높다. 안타깝게도 화이트 로즈의 메뉴판이 그랬다. 총 293개의 메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고, 추천 메뉴나 세트 메뉴 같은 것도 없어 주문하기 곤란했다. 게다가 이런 식당의 특징이 그 수많은 메뉴들 중에서 겨우 하나를 고르면 종업원은 ‘재료가 떨어졌다’, ‘이젠 없어졌다’며 다른 것을 고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심 끝에 고른 닭고기아목은 재료가 떨어져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생선아목, 록락, 꾸이띠유, 볶음밥, 스프링롤 같이 ‘설마 이것도 없겠어?’라는 생각이 드는 메뉴 위주로 주문했다. 우려와는 달리 화이트 로즈의 음식은 맛과 양, 그리고 가격 면에 있어서도 평균 이상이었다.

    폴은 얼마 전 필리핀에 다녀왔다며 돌고래 모양의 열쇠고리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그는 자국에 다녀왔으면서 외국을 다녀온 것처럼 이야기했다. 바탐방이 원래 고향이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폴, 바탐방에는 얼마나 더 있을 거예요?」 내가 물었다.

   「저는 바탐방을 떠날 생각이 없어요.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여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만족하구요.」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아도보는 결국 못 배우고 가네요.」  

   「나중에 기회가 있겠죠. 제가 한국에 갈 수도 있고요.」

   「그래요. 한국에서 보길 기대할게요.」

    유미코는 1년 정도 더 바탐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미코 또한 이곳을 떠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사 후 나와 제이는 상커 강변을 걸었다. 바탐방에서의 마지막 산책이었다. 우리는 귀국하면 앞으로 무엇을 할지 이야기했다.

   「솔직히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지 아직도 확신이 안 서. 지금으로써 가장 확실한 건 이번 여행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는 것 정도야.」 내가 말했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한국에 가서 계속 간호사로 일을 할지, 이쪽 분야를 더 공부할지, 아니면 또 다른 외국으로 가게 될지. 한국으로 돌아가면 확실해지겠지.」

    제이는 최근 통역사 겸 간호사로 다녀온 의료봉사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간호하면서 얼마나 큰 보람을 느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평소 그녀답지 않게 사뭇 진지했다. 나는 그녀의 얘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녀는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을 할 때는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일인지 의문을 가졌는데 의료봉사를 하면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내 머릿속에 엉켜있던 실타래는 이제 다 풀렸을까. 다가오는 서른을 맞이할 준비도 됐을까. 둘 다 아닐 것이다. 애초에 풀 수 없는 실타래였고, 나이라는 건 준비하고 맞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고민도 점점 의미를 잃어갈 것이다. 어쩌면 이런 고민을 했다는 것조차도 잊고 살아갈지 모른다. 서른이 된다고 갑작스럽게 큰 변화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크게 성장하지도, 더 큰 책임을 짊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나대로 살면 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시도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또 시도하면서.

   「이제 이 강변을 산책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그녀가 말했다.

   「응. 저녁마다 여길 걷는 게 참 좋았는데.」 내가 말했다.

   「한국에 가면 많이 그리울 것 같아. 이제 돌아가면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겠지?」

   「아니 왜, 언제든 우리가 오고 싶을 때 오면 되지.」

    우린 말없이 손을 잡고 걸었다.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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