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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쭝 브런치 Feb 24. 2024

여전히 현지적응 중

엘살바도르 음식 적응기와 드디어 개학한 학교

파견 후에도 몇 주간은 OJT 때와 비슷한 생활의 반복이었다. 학교는 아직 방학이었고, 빨간색 승합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학교는 늘 한산했고, 우리가 도착하면 커피와 푸푸사를 줬다. 점심 때는 밥과 고기 또는 생선, 샐러드를 한 접시에 담아 탄산음료나 과일주스와 함께 주는 쁠라또(Plato)를 먹었다. 쁠라또에 밥이 있든 없든 토르티야(Tortilla)는 꼭 함께 줬다.


토르티야는 집집마다 조금씩 다 달랐는데, 타코용 토르티야와 달리 기본적으로 두꺼웠다. 모양은 동그랗고, 온도는 차가운 것부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주 뜨거운 것까지 다 다랐다. 굽기 또한 멀멀한 색으로 딱 익을 만큼만 구운 게 있는가하면 또 노릇노릇 구워 군데군데 갈색 얼룩이 진 것도 있고, 튀기듯 겉을 최대한 노릇하게 구워낸 것도 있다. 나는 적당히 구워서 갈색으로 그을린 자국이 있는 토르티야가 취향에 맞았다. 온도도 찬 것보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것이 좋았다. 


토르티야는 손맛이 중요한 음식 같다. 애초에 만들 때부터 반죽을 손으로 치대고, 평평하고 동그란 모양도 손바닥으로 박수를 치듯 여러 번 눌러서 만든다. 그래서일까 또르띠야는 칼로 썰어서 먹거나 입으로 베어 먹기 보다는 조금씩 손으로 뜯어먹을 때 가장 맛있다. 처음에는 익숙치 않아 또르띠야를 사이드 음식 정도로만 여기고 잘 먹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없으면 허전해서 꼭 찾는 음식이 되었다.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음식은 대부분 간이 셌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물을 늘 옆에 두고 식사를 했다. 디저트류는 또 엄청 달았다. 적당히라는 게 없었다. 대부분 날씨가 더운 탓인지 청량감 있는 탄산음료도 많이 마시는데 캔이든 페트든 대용량이 많았다. 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있겠지만 캔은 355ml가 기본이고, 페트도 2.5~3L를 주로 팔았다. 처음엔 정말 크다고 느껴졌다.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바로 실란뜨로(Cilantro)라고 하는 중남미산 고수였다. 고수를 처음 맛 본 건 아마 태국 여행을 했을 때였던 것 같다. 누군가는 걸레같은 역한 맛이라고도 하는데,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그 충격적인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쉽게 적응하기 힘들어 여행 내내 음식을 주문할 때면 꼭 고수를 빼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고수를 빼달라는 요청이 의미가 없었다. 여행지도 아니고 고수가 기본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많아 애초에 빼고 음식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로 치면 마늘을 넣지 않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거의 강제로 고수에 적응해야 하는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고수를 빼고 먹거나 고수가 들어간 음식엔 입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었다. 고수를 피해서는 먹을 게 많지 않다보니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꾹 참고 먹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 년 정도 반 강제로 고수를 먹다 보니 결코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던 고수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수에 완벽히 적응했을 때는 고수 맛을 즐기기까지 했다. 내가 고수를 즐기는 날이 오다니,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음식하면 또 생각나는 게 샐러드인데, 이곳에서는 샐러드에 특별한 드레싱을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다양한 드레싱을 야채 위에 뿌려 섞어 먹었지만 이곳에서는 라임즙과 소금 정도만 뿌리는 게 다였다. 가끔 올리브유를 함께 뿌리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라임즙과 소금이었다. 이 또한 처음엔 매우 낯설고 허전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우리는 학교로 출근하는 날이면 늘 아침과 점심을 챙겨주곤 했는데, 기관에서 이렇게 아침과 점심을 챙겨주는 곳은 잘 없었다. 심지어 대부분 따로 돈을 받지도 않았다. 다른 단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따로 사먹거나 함께 먹어도 각자 주문을 하고 돈을 내서 먹었다고 한다. 덕분에 생활비를 조금 아낄 수 있었다.


생활비는 한 달에 520달러였다. 주거비는 300달러 정도였고, 이 돈이 매 분기마다 한 번에 임금됐다. 생활비는 달러로 입금이 되기 때문에 현지 돈으로 환전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엘살바도르에서는 환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2001년에 현지 통화를 미국달러로 바꿨기 때문이다. 자국화폐와 함께 통용되는 식도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오직 달러만 쓴다.


다른 국가에 파견된 단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생활비를 환전해서 쓰는 건 은근히 귀찮은 일처럼 들린다. 우선 환율에 따라 생활비가 더 늘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다. 또 환전소에 따라서도 환전되는 금액이 달라 매번 이걸 계산하고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신경이 곤두선다는 것이다. 분명 이런 계산에 능해서 매번 이득을 챙기고 이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휴대전화 요금을 선불로 충전하는 것도 귀찮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달러를 쓰는 나라라서 좋았다.


현지인들 중 일부는 달러를 쓰는 게 불만이다. 그래서 달러를 쓰면서도 엘살바도르 구권인 콜론이라고 말했다. 1달러면 1콜론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달러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달러가 현지의 물가를 너무 많이 올렸다는 것이다. 달러를 쓰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비싸졌으니 불평을 할 만도 했다. 반대로 화폐의 안정화를 가져왔다는 평도 있고, 미국으로 돈을 벌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 자국으로 송금하기 더 편해졌다고도 하니 꼭 나쁜 면만 있도 아닌 것 같다. 


학교에 출근하면 주로 개학 후 진행할 태권도 수업을 준비했다. 교장선생님 프란시스코는 수업 일정을 내가 원하는대로 계획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줬다. 다만 정규 교과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방과 후 수업으로만 가능했다. 학교 수업은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었다. 그래서 나도 수업을 두 번 했다. 오전에는 오후반 학생들을, 오후에는 오전반 학생들이 태권도 수업에 왔다.


수업은 다목적 체육관 강당에서 하기로 했다. 학생들을 모집해봐야 알겠지만 처음부터 많은 인원이 등록할 것 같지 않았고,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인원도 5~6명이 전부일 것 같았다. 수업은 한 시간 정도 하기로 했다. 이렇게 초급반을 한 시간 운영해보고 나중에 중급반을 하나 더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전에는 정식으로 누군가에게 태권도를 가르쳐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나라에 파견된 태권도 직종 동기 단원들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 모두 실력이나 경험 면에서 나보다 나은 친구들이라 도움이 많이 되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까지 수업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매일 출근을 할 때 도복을 챙겨 가 강당에서 혼자 수업을 하는 상상을 하며 연습했다. 학생들이 외국인이고 모두 처음 태권도를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자세히 설명도 해야하고 직접 시범도 많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퇴근을 한 후에도 크레스코의 다목적실에 가서 혼자 연습을 했다. 그렇게 방학이 지나갔다.


드디어 개학날이 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학교는 학생들로 붐볐다. 정말 많은 학생들이 학교 안을 돌아다녔고,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들까지 섞여서 학교 안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학생들은 모두 네이비색 하의와 흰색 상의 교복을 입었다. 나와 마리오를 발견한 학생들은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우리를 보고 치노!(Chino, 중국인 또는 동양인)이라고 외쳐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후 강당에서 개학식이 시작됐다. 교장, 교감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끝나고 우리는 학생들 앞에서서 간단한 소개 인사를 했다.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며 우리를 환영해줬다. 여전히 치노라고 소리치는 아이들도 많았다. 우리는 한국인(Coreano)이라고라고 방금 막 소개를 했는데도 말이다.


교감선생님은 태권도 수업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교무실로 와서 신청을 하라고 안내했다. 우선 2주 정도 모집을 하고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는 체육선생님인 호르헤의 수업을 참관하면서 학생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곳에서의 수업방식이나 체육수업에서 사용하는 현지어 등을 배웠다. 이게 도움이 많이 됐다.


개학식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아이들이 몰려와 말을 걸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신없었던 하루였지만 기다렸던 단원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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