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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쭝 브런치 Feb 20. 2024

4개월 만의 임지 파견

엘살바도르 코이카 해외봉사단원 이야기

현지적응훈련 마지막 날 오랜만에 단복을 꺼내 입었다. 은색과 하늘색 조합인 매우 촌스러운 단복이라 꼭 입어야 하는 때가 아니면 절대로 입지 않았다. 마지막 행사는 현지적응훈련 기간 동안 스페인어를 배운 아카데미아에우로페아 학원에서 했다. 모두가 야외 휴게실에 모여 각자 준비한 스페인어 소감을 발표했다. 나는 스페인어 소감을 외워서 말하고 싶었지만 중간에 막혀 따로 준비한 발표문을 꺼내 읽었다.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준비한 발표문을 꺼내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나를 격려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나의 스페인어 선생님 하비에르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모두 각자 준비한 소감을 마쳤고, 마지막은 우고의 기타 연주와 노래로 장식했다. 태양이 작열했지만 우리가 모여 앉은 그늘 밑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한국에서 한 달간의 군사훈련, 양재 코이카 센터에서 한 달간의 국내훈련, 그리고 엘살바도르에서 두 달간의 현지적응훈련까지 총 4개월 간의 파견 준비를 모두 마쳤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이제는 임지로 파견될 준비가 된 것 같으면서도 아직 독립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제대로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학원 선생님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는 수고했다고 서로를 토닥이고, 낙오 없이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며 축하하고, 새롭게 시작될, 어쩌면 앞으로가 진짜 시작일 단원 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도록 행운을 빌어줬다.


다음 날 우리는 유숙소의 방을 비우고 다시 단복을 챙겨 입었다. 마지막으로 코이카 사무실로 이동해 각자 기관에서 보낸 픽업 차량을 기다렸다. 순서는 따로 없었다. 기관에서 보낸 차량이 도착하는 순서대로 떠났다. 우리는 한 사람씩 떠날 때마다 작별 인사를 했다. 마침내 대한민국명학교에서 보낸 픽업 차량도 도착을 했다. 운전기사와 함께 교감선생님 롤리가 왔다. 우리는 서로를 보자마자 환한 비소로 인사했다. 잠시 떨어져 있었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제 차에 짐을 싣고 소야팡고로 향했다.


픽업온 차는 칠이 벗겨져 군데군데 녹이 슨 붉은색 승합차였다. 옆에 미닫이 문은 제 혼자서는 온전히 기능할 수 없어 조수석 의자에 밧줄로 고정했다. 문을 열 때는 밧줄을 풀고, 문을 닫을 때는 밧줄을 묶는다. 뭐, 간혹 아주 짧은 거리는 탑승자가 문이 열리지 않게 손으로 잡아 고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라 한 번 해보고 두 번 다시는 하지 않았다.


차 내부의 마감은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자동차 공장의 생산라인에 있는 차들처럼 뼈대가 그대로 보였다. 그래도 이건 보기에 좀 그래서 그렇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바닥이었다. 바닥에 카펫은 없었고, 녹이 슬거나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으로는 바닥이 훤히 보였고, 실수로 무언가를 떨어뜨리면 그대로 밖으로 떨어져 나갈지도 몰랐다. 당연히 에어컨은 작동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오는 매연과 흙먼지를 그대로 맞으며 임지로 향했다. 롤리는 이 차가 우리가 앞으로 통근용으로 타고 다닐 차라고 했다. 우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소야팡고라고 적힌 파란색 도로 표지만이 보였다. 다시 도착한 소야팡고는 더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복면을 쓴 무장경찰(이곳은 경찰의 신분이 노출되면 위험해 복면을 쓴다)이 성인 남성 여럿을 벽에 세우고 몸수색을 하고 있었다. 총구를 등진 남자들은 벽을 향해 서서 양손을 뒤통수에 붙이고 양다리를 벌리고 섰다. 그런 모습을 보자 가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제는 훈련이 아니야, 좋은 시절은 다 끝났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실전이다. 


학교는 아직 방학이었다. 우리는 크레스코에 가서 짐을 풀었다. OJT 때 지낸 방과 같은 방이었다. 방에는 여전히 돈 보스코의 초상 사진이 붙어있었다. 나는 우선 단복을 갈아입고 새로 산 필립스 커피메이커를 꺼내 적당한 곳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슈퍼에서 구입한 엘살바도르산 커피를 내렸다. 이내 커피메이커에서 슉슉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증기를 뿜어냈다. 잠시 후 또로록 커피가 떨어지더니 금세 커피 향이 온 방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짐을 풀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꺼내 책상에 올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책 몇 권과 한국 마트에서 구입한 간장, 고추장, 라면도 꺼냈다. 도복과 옷가지도 꺼내 붙박이 장에 걸었다. 이게 전부였다. 


짐을 다 풀고 마리오와 함께 조촐한 저녁식사를 했다. 공용 주방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다른 학생들은 일찍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게 익숙해 보였다. 우리도 일찍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우덕룡의 종합스페인어 책을 펴고 잠시 스페인어 공부를 했다. 밤이 깊어지자 또다시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내 음악소리보다 더 큰 폭죽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폭죽 소리 중에는 총소리도 섞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책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폭죽소리는 계속됐다. 하지만 아직 사이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파견 첫날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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