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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 Feb 22. 2022

배움이 고프고 좋은 사람이 그리울 때

내가 읽은 것들

2월의 끝자락,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 요즘이다. 가 닿지 않을 안부라도 무작정 묻고 싶은 그런 날에 이 책을 읽었다.


정혜선의 <나의 덴마크 선생님>

저자 정혜선은 지리산 대안학교인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맑은 물이 흐르고 푸른 산에 폭 안겨있는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해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저자는 어느 날 자신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교육을 받는 아이들을 보며, 문득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부러운 마음을 품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말이 되나,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는 짐을 꾸려 덴마크로 떠난다.

서른 아홉, 마흔을 한 해 앞둔 서른의 끝자락에서 저자는 '나에게도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어떤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끼고 있었을 때, 몸과 마음이 지치고 소진되었을 때, 저자는 다시 학생이 되기로 한다. 그리고 덴마크 세계시민학교, IPC에 입학한다.


덴마크는 산이 많은 한국과는 달리 대부분이 평야 지대라고 한다. 너른 평야 위에 숲길이 나 있고 잔잔한 호수가 있으며 꽃과 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곳. 바로 그곳에 백년 전통의 학교, IPC가 있다. 저자는 봄학기 입학생 중에서 가장 연장자다. IPC를 찾은 학생들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거나 20대 청년들이다. 한참 어린 친구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다는 일보다 저자를 더 부담스럽게 만든 건 어떤 문화를 함께하는 일이었다. 돌아서면 에너지와 열정이 채워지는 청년들 틈에서 저자는 어색한 적응을 시작한다.


삶에는 그런 순간이 있어. 눈앞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려고 하는 순간, 나는 그때 망설이지 않고 기차에 올라탔어


덴마크 세계시민학교, IPC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고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며, 무엇보다 특별한 건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기숙사에서 함께 산다는 점이다. 교육기관이기 이전에 삶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곳이다. 지리산의 아이들처럼 나에게도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북유럽까지 날아왔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이 학교가 마음에 든 건 아니었다. IPC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가 생각한 배움은 좀 더 거창한 무엇이었지만 처음 겪어본 IPC의 수업은 저자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다. 무언가 큰 세상을 만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하루하루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자는 실망도 하고, 가끔은 이곳을 선택한 걸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의심은 머지않아 확신으로 바뀐다. 바쁘고 열심히 사는 나라, 한국에서 온 학생의 조급함을 알아챈 덴마크 선생님은 그녀가 삶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을 일깨워준다. 좀 천천히 가도 된다고. 느려도 괜찮다고. 훌륭하지 않아도 된다고. 꼭 무언가 대단한 걸 얻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아마도 누군가가 경험한 세계를 나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의 IPC 생활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서 덴마크 세계시민학교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다. IPC의 수업은 크게 팀을 이뤄 진행되는 프로젝트 수업과 발표와 토론수업, 현장 체험학습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 학기 다양한 주제의 수업을 개설된다.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살아온 학생들은 팀을 이뤄 하나의 과제를 수행해나가며 자신의 편견과 마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저자는 일본 학생들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발표하기도 하고, 지리산 작은 학교에서의 경험을 나누기도 한다. 모든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살아온 삶에 기초하고 있는 생생한, 살아있는 이야기다. 그 경험과 지식들을 나누며 IPC의 학생들은 하루하루 성장해나간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저자는 한동안 향수병을 앓듯 IPC와 덴마크 선생님들을 그리워했다고 전한다. 내 삶을 진동시켰던 진한 기억이 있는 곳은 쉽게 잊기 어렵다. 저자는 실컷 IPC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다 더 이상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에게도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줄 선생님이 생겼을 때, 다시 지리산 작은 학교로 돌아간다.

 

나는 적당히 성찰적이고 북유럽의 풍경과 일상이 묘사되어 여행하는 기분도 빌려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책을 선택했다. 어떤 책을 읽기로 결심한 이유치곤 다소 가볍지만 그런 가벼운 결심이 의외의 세상을 만나게 해주기도 하는 법이다. 살다보면, 분명 많이 배웠지만 하나도 배우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오는 것 같다. 진짜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쉬어가며 주변을 둘러볼 줄 아는 법, 느려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법, 서로를 돌보는 법, 나보다 공동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법 같은 것들 말이다. 인생이 어딘가 꽉 막혀, 답보 상태에 놓여있다고 느껴질 때, 그 순간에 필요한 건 섣부른 자극이 아니라, 어떤 전환일지도 모른다. 자극보다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내 앞에 또 다른 삶으로 가는 기차가 지나간다면 나는 그 기차에 주저없이 올라탈 수 있을 것인가.


아, 이 책이 좋은 작고 소중한 이유를 하나 더 말하고 싶다. 북유럽의 길고 추운 겨울에 대한 묘사와 오후 4시가 되면 초를 켜고 수업을 해야할 정도로 어두워지는 북유럽의 긴 밤, 그 밤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지 아니한가!


거트루드 선생님은 우리가 심은 작물의 열매를 다음 학기에 오는 다른 사람들이 먹게 될 것이라고, 인생은 그런 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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