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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 Jan 31. 2022

나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행위

우울해도 살아가기

요리를 했다. 밥을 짓고 찌개를 끓였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우울증은 많은 신체적 증상을 동반하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식욕 부진'이다. 우울증 환자가 겪는 식욕 문제는 안 먹거나 너무 많이 먹거나, 둘 중 하나다. 우울증에 걸리면 수면과 식욕부터 큰 타격을 받는다. 우울증 환자들은 일상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욕구들을 '적당히' 조절하는 일이 어렵게 되고 인간의 삶을 운영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욕구 두 가지를 모두 잃게 된다.


우울증 환자인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음식을 먹지 않는 방향으로 증상이 나타났다. 소화장애를 앓기 시작했고 음식을 먹으면 언제나 위장이 불편했다. 아침, 점심을 걸러도 전혀 배고프지 않았다. 음식을 먹는 행위를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졌다. 인간이, 살고자 이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고작 밥 한 끼 먹는 일인데 살려고 발버둥 치는 인간 같아 나 자신이 싫어지곤 했다. 만약 내가 아홉 시에 출근에 오후 여섯 시에 퇴근하는 회사를 다니지 않았더라면 점심을거르는 일도 허다했을 거다. 그나마 회사에서는 오후 12시가 되면 의무적으로 점심을 먹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서 동료들의 이끌림에 의해 점심밥을 먹는 루틴이 생겨서 다행이랄까.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마른 사람은 이유가 있다' 등의 말들을 듣게 되는데, '원래부터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대답하기가 참 난감하다.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런 무거운 이야기를 꺼낼 만큼의 관계들은 아닌지라, 그냥 '네, 좀 그런 편인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며 넘긴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나는 오히려 대식가였다. 워낙 먹지 않아 부모님 속을 썼였던 언니와 달리, 나는 포크질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생선을 발라먹는 아이였다. 먹는 일로는 부모님이 걱정할 일을 만들지 않았다. 성장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서도 한 동안은 통통한 체형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먹는 일로 고생을 하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우울증을 앓고 나서부터는 먹는 일로부터 가장 먼저 멀어졌다. 먹는 일이 부담스럽고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우울증의 대표적인 정서와 행동적 반응은 '무의욕'이다. 의욕이 저하된 상태이기 때문에 잘 챙겨 먹지 않게 되고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음식과 요리로부터 멀어지고 나서부터는 우리 집 냉장고는 배달음식 저장소가 되었고, 음식을 덜어먹고 난 그릇들은 어느 순간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쌓여 급기야 청소 서비스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누군가에겐 청소 안 하는 게으른 자취생의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우울증 환자에겐 이 상태 또한 전투의 흔적일 수 있다.


나를 먹이는 일은 중요하다. 먹이는 일을 멈추면 생도 멈춘다. 어떻게든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하는 일이 먹이는 일이다. 배달음식도 좋지만 손수 만들어 먹이는 음식은 큰 의미가 있다. 적절한 시간에 끼니를 잘 챙겨주는 일, 그건 우울증 회복의 시작이자 지표가 된다. 우울증이 재발하고 난 뒤, 오랜만에 요리를 했다. 설날이니까 떡국이라도 만들어먹을까 생각했지만 가장 중요한 재료인 떡이 없었다. 장을 보러 나갈 에너지까진 없었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식재료로 간단히 된장찌개를 끓였고, 1인분 솥에 밥도 지었다. 감자와 양파를 삭삭 썰고 쌀을 씻고 밥을 안치고 불을 켜고... 흔히 우울증 환자들에게 회복이 지금보다 나아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우울증 환자에게 회복이란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 더 가깝다. 삶을 구성했던 요소들을 적절한 곳에 다시 배치하는 일, 그래서 다시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 먹어도 된다. 건강하고 좋은 음식을 먹을 만큼 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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