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해도 살아가기
연휴를 이틀 남기고 서울 강남의 모 호텔을 찾았다. 일본식 스파로 꽤 유명세를 탄 곳이었다. 지인의 추천으로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처음 이용했을 당시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나는 기분이 가라앉을 때마다 종종 서울 시내의 호텔을 찾는다. 우울감이 심해지면 집은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온갖 부정적 생각들에 압도되어 먹고 자는 일을 놓게 되는 순간이 오기 전에 무엇이든 해야 한다. 이럴 때는 다른 생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생각보다 빠른 행동이 필요하다. 속전속결로 세면도구와 노트북, 그리고 전자책 정도만 챙겼다. 최소한의 짐을 꾸려서 서울 강남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보통 밖에 나갈 때는 운전을 하는 편이지만 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낙제점을 받은 영양소 비타민D를 조금이라도 채워볼까 싶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우울증 환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 일단 반은 성공한 거다. 일단 버스를 타면 버스기사님이 나를 호텔 근처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한 90%는 성공한 거다. 그날 하루는 어찌어찌 나라는 공장이 돌아갈 거라도 믿어도 된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집에 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내가 나타난다. 불시에 일격을 가하는 그 녀석과 나름 싸워서 이긴 기분이다. 물론, 이번에도 아침약의 도움을 받았다. 우울증 환자는 보통 항우울제와 불안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는데, 이 약들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우울증 약이 심리와 성격적 문제까지 일거에 해결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흔들리고 뭉개지는 마음 때문에 힘들어지지 않게 도와주는 구명조끼라고나 할까. 어쨌든 약에 보조를 받아 연휴 마지막은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대충 짐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계량한복 같기도 한 실내복은 은근 정감있고 좋았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몇 번 이 호텔을 이용하다보니 실내복을 입고 호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내가 썩 맘에 들었다. 뭔가 호텔에서 사는 사람 같고...호텔은 깔끔하고 심플했다.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부대시설도 맘에 든다. 스파와 라운지. 호텔 투숙객이 이용할 수 있는 건 이렇게 두 개다. 먼저 라운지를 찾았다. 일본에 본사를 둔 호텔이라 그런지 일본 도서가 많았다. 언어 때문에 대부분은 디자인이나 인테리어 관련 잡지책이었지만. 일본 책들과 함께 진열된 국내 도서들이 눈에 띄었는데, 누군가 정성껏 큐레이션 해놓은 흔적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림책이 진열된 것이 특이했는데, 어린 손님까지 챙긴 세심함이 엿보인다. 나는 한국에 살면서 다중이용 시설에서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아이들을 독립적인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 같아서이다. 심지어 대놓고 노키즈존까지 있지 않은가.
라운지에서 제공하는 맥주를 세 잔이나 마셨다. 오랜만의 낮술이었다. 우울증 약과 술을 같이 먹어도 되나. 순간 고민했지만 늘 마시는 건 아니기 때문에 용인해주기로 했다. 사실 이 라운지에서 무료 맥주(사실 무료는 아니지)를 무한 리필하여 마시지 않으면 라운지를 제대로 이용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귀에서 자꾸 맴돌아서... 맥주에 손을 댄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이제 무얼 한담. 호텔에서의 생활은 집에서의 생활보다 더 미니멀하다. 나의 때묻은 물건과 흔적이 전혀 없는, 오염되지 않은 곳. 호텔에 왔다고 해서 특별할 건 없지만 이런 단순하고 깨끗함이 좋다. 기분탓인지 이상하게 호텔에 오면 생각도 단순해진다. 먹고, 자고, 씻고. 오직 이 세 가지를 정성껏 하게 된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호텔에서 더 정성껏 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인생에서 크고 작은 군더더기들을 다 떼어나고 본질만 남긴다면 결국 인간에겐 먹고, 자고, 씻는 일이 전부라는 의미일까. 앞서, 우울증 환자에게 놓여진 과제는 무너진 사람다움을 다시 세우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호텔에서는 일시적이나마 사람다움이 가능하다.
이쯤 되니, 왜 기분이 가라앉을 때마다 호텔을 찾게 되는지 그 이유가 좀 더 선명해진다. 집이란 공간은 아무리 물리적으로 청소를 한다고 해도 집에 스며든 기억들마저 청소할 수는 없다. 집에서 힘들어했던 일, 집에서 잠 못잤던 일, 집에서 해소되지 않은 분노로 부들거렸던 일...모든 기억이 집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이라는 지옥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새롭고 안전한 공간이 늘 필요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또 누군가가 정성껏 차려준 조식을 먹겠지. 조식을 먹기 위해 시간 맞춰 일어나는 그런 일은 집이라면 상상도 못하지만 호텔이라면 가능하다. 호텔에서는 먹고 자는 일에 진심이 된다. 그런 일상성이 너무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