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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볼 때는 큭큭 웃었는데 보고 나니 눈물이 나네? 이런 신기한 경험을 주는 영화를 한 편 소개하고자 한다. 봉준호 감독이 '가장 아름다운 다큐'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감독 이혁래, 김정영)이다.
토요일 오후,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을 보러 파주로 향했다. 요즘 영화를 보러 한 달에 한 번은 꼭 방문하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파주 영화마을에 위치한 '명필름 아트센터'다. 이 곳은 영화 제작사 명필름에서 만든 영화들과 한국영화 전반에 대한 자료가 있는 곳으로 승효상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하여 더 화제가 된 장소다.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매주말마다 상영된다. 뿐만 아니라, 영화 티켓을 구매하면 2층에 있는 까페에서 사용할 수 있는 1천원 음료 할인쿠폰을 주는데,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에 대한 여운을 가득 안은 채 까페에 가서 커피나 차를 마시며 영화 리뷰 포스팅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매 주말을 이렇게 보내다보니 어느덧 패턴이 되었고, 이 공간에 가면 일종의 의식행위처럼 똑같은 단계를 밟는다. 한동안 무기력하고 모든 것이 의미없게 느껴졌던 일상이었는데 취미라고 불러도 될법한 일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꽤 좋다.
'명필름 아트센터'에는 상영관이 딱 하나 있다. 듣기론 최첨단 사운드 시설을 갖춘 곳으로 영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세계에 영화와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고개가 좀 아프더라도 앞자리 좌석을 고르는 편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은 전태일 열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70년대 시다, 여공이라 불렸던 10대 소녀들의 인생을 40년 세월이 지난 현재 실제 인물들의 구술을 통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주인공들을 과거의 특정 시점에 머물게 두지 않는다. 40년 전 그녀들과 40년 후 그녀들은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뜨겁고 생생하게 인생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푸른 들판 위에 놓여진 세 개의 미싱을 흥겹게 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미싱을 타는 세 명의 주인공은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선생님이다. 너른 들판 위에 놓은 미싱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표정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그때도 이런 곳에서 일을 했다면 미싱을 좋아했을 거야' 누군가의 말이 가슴에 와 꽂힌다. 그녀들이 시다생활을 시작한 건 열넷, 열여섯 나이였다. 그녀들이 구치소에 있을 때 대학생 언니들이 했다는 말 '너같이 조그마한 애가 어떻게 여길 왔니' 라는 말처럼 일하기엔 너무 어린 소녀들이었다. 환기 시설도 없는 3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화장실도 못하고 열두 시간 넘게 미싱을 타야했던 소녀들. 그 노동을 상상할 수 있는가.
영화의 오프닝 속 미싱을 타는 그녀들의 모습은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의 그녀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자가 무슨 공부를 하냐고, 중학교를 안 보내줘서 돈을 벌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평화시장에 들어왔다는 이들은 청계피복 노동조합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투사였기도 했지만 생계를 위해 성실히 밥벌이를 하며 미싱이라는 기술을 연마해온 장인이기도 하다. 나는 영화가 70년대 미싱을 탔던 여성 노동자들을 하나의 직업인으로 바라본 그 시선이 참 좋았다.
영화는 주인공이 그 시절 사진들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녀들이 구술로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켜켜이 쌓여 하나의 서사를 만든다. 이소선 여사 10주기가 되던 지난 해, 방송계에서는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에 대해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다수 만들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들에서는 이들의 삶을 거시적인 역사의 일부분으로 접근하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산업화, 민주화에 이바지했지만 역사가 기록하지 않았던 비운의 사람들, '국가와 가정을 위해 희생한 그녀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같은 프레임으로 이들의 삶을 조명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선이 맘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익히 알고 있듯이 이들은 사실상의 가장이었고 산업화의 중심에 있었으며 민주화에 앞장섰던 주체적이고 뜨거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그 사실을 영화는 꼼꼼하게 드러낸다. 그녀들은 천진함과 뜨거움으로 어려움을 돌파해나갔던 깡 한 번 제대로인 소녀들이었기에, 제2의 전태일이라는 수식어는 그녀들의 앞에 붙음이 마땅해보인다.
영화에서는 청계피복 노동조합에서 어린 조합원들에게 교육과 다양한 배움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던 노동교실에 대한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공부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고,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원망을 해소시켜 준 곳이 바로 노동교실이었다. 이들은 고된 일을 마치면 늦은 밤이라도 노동교실을 찾았다고 한다. 그녀들에게 노동교실은 삶 그 자체였다고 한다. 모든 것에 언어화는 중요하다. 노동교실을 통해 내가 처한 현실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명징하게 말할 수 있게 된 순간, 그녀들의 에너지는 나에서 너로, 우리로 확대됐다.
99사건. 1977년 9월 9일에 일어난 사건을 부르는 명칭이더라. 부끄럽게도 나는 이 사건을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빼앗긴 노동교실을 되찾기 위한 점거 투쟁 결과,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세 사람은 구속되었다. 99사건 이후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힘을 잃게 되고 침체기를 걸었다고 한다. 북한군의 지령을 받았냐고, 노동교실에 모여 빨갱이 짓을 했다고 무자비하게 몰아부치고 인권을 짓밟았던 사건. 그녀들은 증언한다. 무슨 일을 잘못했는지 모른채 감옥을 산 세월이 떠올라서였을까.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흘리던 눈물이 가슴에 남는다. 힘들었어도 찬란했던 청춘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부당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영화는 무겁지 않다. 오히려 점거농성하다 경찰에 끌려가고 억울하게 감옥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유머까지 곁들어 이야기한다. 한 시절을 함께 하고 40여년 인연을 이어오며 더욱 더 끈끈해진 그녀들의 우정이 영화 전반에 흐른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의지하며 버텨온 세월이기에 그 우정은 더욱 빛난다. 40년 전, 야무지게 현실을 헤쳐나갔던 사진 속 소녀들의 모습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관심이 없어. 잠깐 아 그렇구나, 하고 지나갈 뿐이야" 임미경 선생님이 이번 다큐멘터리 출연을 앞두고 망설이자, 딸은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이렇게 쿨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이들이 들려준 서사는 쉬이 잊혀지기 어려울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을 제대로 알게 해준 영화였고, 사진으로 만나본 왜소하지만 강단있던 그 소녀들의 모습이 한동안 잔상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 자신과 사회와의 연결고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산 지 오래되었는데, 중요하지만 잃어버렸던 무엇을 되찾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영화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게 상영관도 늘어나고 영화관에 좀 오래 걸려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제 힘으로 온전히 살아내려 애썼던 아름다운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두 번, 세 번 보기를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