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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건호 Nov 17. 2019

성 앞을 지키는 네 명의 노인들

리베르다드광장. 치즈성 .

포르투에는 서울처럼 2층짜리 시내버스가 있다. 엄연히 '500번'이라는 번호를 달고 포르투 시내를 이동하며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생김새 때문에 간혹 '시티투어' 버스와 혼동할 때가 있다. 실제로 해변을 따라 멋진 뷰를 선사하는 주행코스로 인해 많은 여행객들이 관광용으로 승차하는 버스이기도 하다. 포르투 관광지도조차 500번 버스를 타고 해변가를 따라 돌아보는 코스를 추천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건 꼭 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오후 일정은 버스를 타고 비교적 도심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여유롭게 보내보기로 했다.


안내에 따라 500번 버스가 출발하는 리베르다드 광장으로 이동해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이미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2층 버스의 묘미는 윗층 가장 앞좌석에 앉아 커다란 유리창 앞으로 펼쳐지는 경치를 바라보는 것일 텐데 이 정도면 2층의 비인기 자리를 차지하는 것조차 벅차 보였다.


곧 버스가 왔다. 지금은 '언제 가느냐?' 보다 '어떻게 가느냐?'가 더 중요하므로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몇몇 사람들이 버스를 타지 않고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정류장 건너편에는 동 페드루 4세 동상이 서 있었고 그 뒤로 시원하게 트여있는 광장길 끝에는 시청사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마치 광화문 광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멋진 전망을 두고 기다림의 시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펜과 종이를 꺼내 들고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다.


정설인지 속설인지 모르겠지만 한때 들었던 기마상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것은 바로 말의 다리 형태와 관련된 내용인데 말이 앞다리를 하나만 들고 있으면 말 위의 인물은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이후 사망한 것이고, 앞다리를 모두 들고 있으면 전쟁에서 즉사를 한 것이며, 네다리가 모두 땅에 닿아 있다면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설이다. 동 페드루 4세 동상에도 이와 같은 설에 적용되는 것인지 궁금하여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부상으로 온 합병증이었을까?


그러던 중 생각보다 빨리 버스가 왔다. 이전에 이미 버스 한 대를 보냈기에 드로잉북을 덮고 버스를 타야 하나 싶었지만 결국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로 하고 계속해서 남은 부분을 그렸다. 버스는 다음에 또 있겠지만 지금 버스를 타고 간다면 다시 그림을 그리러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끝까지 완성을 하고 싶었다.


결국 두 대의 버스를 보낸 대신에 드로잉 작품 하나와 버스 2층 맨 앞좌석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생전 처음 탑승해보는 2층 버스의, 그것도 가장 인기가 좋은 자리에 앉아 유리창 너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눈높이가 고작 몇 미터 높아진 것일 뿐인데 경험하지 못했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은 새롭게 느껴졌다. 버스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해야 할 것 같은 위치라서 그런지 방향을 바꿔가며 이리저리 움직일 때는 마치 자율주행 중인 아주 큰 트럭을 타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커다란 통유리 창문을 바로 앞에 두고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눈부신 햇빛이 정면으로 나를 내리쬐고 있지만 여행 중에는 왠지 모르게 햇빛에 관대해지는 탓에 이마저 피하지 않고 즐기게 되었다.


버스는 도우루 강을 따라 대서양과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해변 도로 위를 이동했다. 포르투 관광지도를 보면서 눈에 들어온 곳이 있는데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위치에 예쁘게 그려져 있는 성이었다. 'Castelo do Queijo'라고 적혀 있어 이를 번역해보니 '치즈성'이라고 한다. 전혀 유래를 알 수 없는 생뚱맞은 이름에 왠지 '미키마우스'나 '제리'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귀여움마저 느껴졌다. 마침 버스 경로가 치즈성과 가까운 도로를 지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치즈성에 가보기로 했다.


이곳에도 제주도 올레길만큼 길진 않지만 해변을 따라 걸어 다닐 수 있는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모래사장과 이어진 이 길을 따라가니 저 멀리 치즈성으로 보이는 건물이 나왔다. 성이라고 하기에는 비교적 작고 조촐해 보여서 처음에는 치즈성이 아닌 줄 알았지만 바다를 가장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건축물은 여기에서 저곳 하나밖에 없었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호카곶에서도 그랬지만 대서양의 바람은 매우 매서웠고 뜨거운 햇빛의 열기는 나의 몸에 도달하기도 전에 날아가버렸다. 머리는 이미 정리를 포기했을 만큼 바람에 이방향 저방향 휘날려 헝클어져 있었다. 막 썸을 타기 시작한 연인들이 데이트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곳인 것 같았다. 나라면 여기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좋은 이유는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와 대서양과 어우러져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치즈성의 모습이 때문일 것이다. 굴곡진 길 너머 홀로 굳건하게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치즈성을 보며 문득 뛰어나거나 화려한 삶은 아니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시련을 이겨나가는 평범한 우리 각 개인의 모습이 떠올라 왠지 가슴 뭉클한 여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날은 쉬는 날인지 성의 출입구가 굳게 닫혀있었다. 내부가 궁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지나쳐 앞으로 이어진 산책길을 마저 걸었다. 성을 지나자마자 바로 옆에서 노인 네 명이 치즈 조각 같이 생긴 바위에 둘러앉아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재미로 게임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나도 모르는 엄청난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들이 서쪽하늘로 조금씩 저물어가며 바닷가를 비추는 태양 아래 옹기종기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은 매우 한적하고 평안해 보였다. 그들의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했다.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한다는 것. 우리는 이럴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특히 자신이 관심 있고 좋아하는 활동일수록 더욱 지속성을 가지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붙어 다니며 괴롭히는 고통이라는 운명의 일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이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에 더욱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반적으로 노후자금을 마련해놓기 위해 적금, 펀드, 부동산 등을 준비해놓는다고 하지만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이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취미나 활동을 발굴하고 꾸준히 그 길을 닦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한 노후대비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는 것은 10대, 20대 때 고민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30대, 40대, 50대 그 이후로도 계속해야 할 인생의 숙제 같은 것이다. 그런 일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찾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활동하는 습관을 꾸준히 가지다 보면 그 과정 속에서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치 지금 저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함께 카드게임을 즐기며 황혼을 보내고 있는 네 명의 노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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