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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건호 Sep 27. 2021

꽃을 말리는 남자

사람의 마음을 기억하는 일

 광장에 앉아 한쪽을 바라보니 연보랏빛 꽃들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은은한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흩날린다. 지난 전시회에 친한 지인이 찾아와 조용히 놓고  라벤더 꽃다발이 떠올랐다. 받은 꽃을 일일이 말린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기억했는지 마른 라벤더 꽃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섬세한 마음이 고마웠다.



 내 방 곳곳에는 말린 꽃들이 산재해 있다. 책상 위에는 하얀 작약이, 서랍장 위에는 노란 프리지아가, 선반 위에는 여러 종류의 장미들이 꽃병에 모여 흙빛으로 함께 바래져 가고 있다. 어떤 꽃들은 꽂아둘 병이 없어 몇 달째 방 한쪽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중이다. 종종 전시회를 열던 날에 나는 꽃을 받아 왔다. 축하의 의미로 꽃다발을 건네주는 지인들이 고맙긴 했지만, 꽃을 받는 것이 내심 내키지가 않았다. 첫째는 시들어가는 생명을 바라보는 것이 마음 아팠기 때문이고, 둘째는 시든 꽃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을 때 찾아오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품에 안아온 꽃다발을 집에 며칠을 두었다 버려야 할 때는 마치 연인과 헤어지는 듯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적에 이모의 방에서 보았던 빨간 장미가 문득 떠올랐다. 장미는 벽 거울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잎에는 여전히 붉은빛이 돌고 있었다. 이모는 꽃을 거꾸로 걸어 두면 모습이 그대로 유지된 채 마른다고 알려 주었다. 이모의 말이 생각난 순간부터 꽃을 받아오는 날이면 늘 방 한쪽에 꽃들을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꽃이 시드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그때부터는 꽃을 받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고, 받은 꽃을 말려 보관하는 것이 어느새 습관으로 남게 되었다.


 하루는 이런 습관을 친구에게 말하자 내가 쓸데없이 부지런하다며, 꽃을 받는 순간에 좋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선물은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감안했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꽃을 말려야만 마음이 편했다. 꽃을 말리며 생각해  적이 있다. 귀찮음을 마다하고 계속해서 꽃을 말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시듦에 대한 안타까움과 버림에 대한 미안함이 느껴지는 마음 깊숙한 곳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꽃을 말린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을 기억하는 일이다. 누군가 나를 생각하며 꽃을 고르던 시간, 나의 미소를 떠올리며 꽃을 들고 걸어왔을 마음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소박한 바람 같은 것이다. 시든 꽃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어야 할 때는 꽃에 담긴 상대방의 마음과 나의 감사함까지도 시들어 버려지는 듯한 마음이 든다. 꽃에는 알록달록한 빛의 생기뿐만 아니라 사람의 따뜻함이 머물러 있으니까.


 꽃을 전해 준 많은 이들을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다. 몇몇은 연락마저 닿지 않는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금세 시들어 버리는 꽃만큼이나 유약하다는 것을 알수록 더더욱 나는 받은 꽃을 버리지 못한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늘 변함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믿는다. 다시 오지 못할 곳에서의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 여전히 나는 꽃을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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