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당신에게 묻는다.
몇 년 전, 이태원동의 한 육교 위에서 길거리 전시회를 열었던 적이 있다.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작품을 내보이기 위해 갤러리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거리에서 연주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음악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버스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고, ‘미술은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취지로 길거리 전시를 계획하게 되었다.
내심 나의 무모한 시도가 외면될까 걱정되었지만, 사람들은 고맙게도 관심 어린 시선으로 작품들을 바라봐 주었다. 몇몇은 그림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거리에 퍼지는 노래 대신 길 위에 펼쳐 놓은 그림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할 생각에 전시하는 내내 설레었다. 환호와 갈채 대신 그림에 집중하는 눈빛으로 화답하는 사람들을 보며, 무딘 마음으로 지나갈 법했던 익숙한 자리에서 색다른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 가기를 바랐다.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들은 일상과 동떨어진 특별함이 아니라 우리 삶 도처에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그 이후로 누군가가 거리에서 자신의 그림을 펼쳐 두고 있을 때면 관심 있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며 작품을 감상하고는 했다. 거리로 나오게 된 계기는 각자 다르겠지만, 그들을 보면 나의 지난 모습이 떠올라 반가움과 함께 격려받는 느낌이 들었다.
리스본에서도 길거리를 걷다 우연히 길거리 전시를 마주한 적이 있다. 카르무(Carmo) 수녀원 옆 길목에서 산타 후스타(Santa Justa) 엘리베이터 전망대로 이어지는 작은 샛길에서였다. 벽면 한쪽과 바닥에 펼쳐진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고, 그 옆에는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 펜을 끄적이고 있었다.
“여기 그림들 모두 직접 그리신 건가요?”
그림을 살펴보던 중 그녀에게 물었다.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다는 그녀는 틈틈이 그림을 그려 길거리에서 전시를 한다고 했다. 그림에는 주로 리스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현지 예술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도시의 모습은 어떠할지 호기심을 자아냈다. 눈에 익은 곳부터 전혀 알 수 없는 장소까지,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여행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 그리는 일이 행복하세요?”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길거리 전시를 하던 사람들에게 항상 물었던 질문이다. 사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면서도 물었다. 자발적으로 이런 일을 할 정도라면 어떤 답을 할지 분명했고, 나는 그 대답을 듣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좋아하는 일을 주변의 강요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 아닐까요?”
물음에 답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생동감이 넘쳤다. 그림을 그리는 나의 모습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그 순간의 기쁨을 알기에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대답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되물었다.
“그럼, 당신은 무슨 일을 하세요? 그림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녀의 질문에 회사원이라는 단어 말고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심지어 회사원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무엇인지 순간 생각이 나지 않아 멈칫거렸다. 그러다 번뜩 한마디가 떠올랐다.
“작가예요. 저도 그림을 그려요.”
무턱대고 입 밖으로 꺼낸 대답이었지만 작가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유대감을 느꼈는지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슨 도구로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이곳에서도 그림을 그렸는지 등을 물었다. 그리고 앞서 그녀에게 물었던 질문을 내게 다시 되물어왔다.
“그럼, 당신의 일은 행복한가요?”
이번에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을 작가라고 소개한 지금 이 시점에서 ‘나의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그녀의 말을 빌려 보았을 때 ‘드로잉’이라는 활동은 내게 행복감을 주는 일이었다.
예전에 MBTI 적성 검사를 본 적이 있다. 두 번 검사를 보았는데, 한 번은 직장에 막 들어왔던 신입 사원 연수 시절이었고, 다른 한 번은 시간이 흘러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흥미롭게도 두 결과는 서로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나왔다. 전자의 경우에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유형으로, 후자의 경우에는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유형으로 나온 것이다. 어느 한쪽만으로 나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림이라는 활동을 통해 나의 에너지가 더욱 왕성하게 발산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세상 속에서 점점 팽창하는 나의 존재감을 느끼며 온전한 나 자신을 찾는 시간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나에게 행복한 것이었다.
대화가 끝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림을 한 점 그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원 건물 벽에서 뻗어 나온 아치형 통로와 그 너머로 보이는 전망대의 풍경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사람들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 믿었던 안정된 직장 생활
은 지난 10년 동안 그 어떤 무모함이나 용기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모터가 멈춰 버린 배 위에서 그저 둥둥 떠다니는 느낌만 들뿐이었다. 그러나 길바닥 한 곳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이 순간만큼은, 이태원동의 육교 위에서 길거리 전시를 하던 그날만큼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단단한 용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앞뒤를 따지지 않고 용기만으로 행동에 나서던 순간, 무의식적으로 나는 어떤 일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남들의 시선에 좋아 보이는 일보다는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일,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길거리 전시에서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나는 가끔 동료에게 현재의 일이 본인을 행복하게 하는지 묻는다. 대부분은 ‘그냥 하는 거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지나가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태어나 있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알아 가면서 온전한 나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쥐고 있는 일이 행복한 것인지 늘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당신의 일은 행복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