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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건호 Nov 12. 2021

에스프레소를 잘 내린다는 것은

경복궁역 통의동의 어느 골목

에스프레소를 처음 접한 때는 체코의 어느 바(Bar)에서였다. 정확하게는 숙소 옆에 있던 이탈리안 바였는데, 줄곧 '바'라고 하면 위스키나 칵테일을 파는 곳으로 알았던 나는, 이탈리아에서 '바'는 우리나라의 카페 개념을 두고 부르는 공간임을 이날 알게 되었다.


이날은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고 싶어 메뉴에서 ‘Americano’를 찾아보았으나 아무리 보아도 그곳엔 내가 찾는 단어가 적혀있지 않았다. 계산대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며 주문을 기다리는 점원의 눈길이 느껴졌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도 민망해 다시 한번 빠르게 메뉴판을 훑어보았고, 순간 Espresso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단어 같아 그것이 혹시 아메리카노가 아닐까 추측하며 '에스프레소, 플리즈'라 외쳤다.


에스프레소를 한 번도 주문해본 적이 없던 나는, 그제야 에스프레소가 아담한 잔에 담겨 나오는 작은 양의 매우 진한 커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잔받침 위에는 각설탕 하나와 작은 스푼이 함께 달려 나왔고, 그것들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지도 못한 채, 아이들 소꿉놀이하는 것 마냥 조그맣고 귀여운 잔의 손잡이를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두 입술 사이로 갈색 크림이 덮인 고동색 액체를 '쓰읍'하고 빨아들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종종 카페에 가면 에스프레소를 찾고는 했다. 하지만 에스프레소의 맛은 카페마다 모두 달랐고, 더욱이 체코의 이탈리안 바에서 경험했던 맛은 결국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는 분명 달콤 쌉싸름하면서도 고소했고, 강렬하면서도 목넘김이 부드러웠는데, 새롭게 도전한 에스프레소는 이상하게도 쓰기만 했다. 분위기가 만들어낸 낭만의 맛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그렇게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며칠 전, 어김 없이 산책을 하기 위해 서촌의 한 샐러드 가게에서 점심 끼니를 빠르게 해결하고, 경복궁 쪽문으로 이어지는 조그만 골목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흰 간판의 에스프레소 바가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지인이 경복궁 역 근처에 조그만 에스프레소 바가 있다며 그곳에 꼭 가보라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곳을 마주한 것이다. 왠지 마음에 이끌려 들어간 그곳은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필두로 커피음료를 취급하는 보통의 카페와 달리 에스프레소를 기본으로 취급하는, 조금 더 에스프레소에 집중하는 곳이었다. 이름부터가 '카페'가 아니라 '바' 였으니 말이다.


'에스프레소, 한 잔 주시겠어요.'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문하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말투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한때는 호기심 반, 허세 반으로 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에스프레소를, 오로지 맛을 음미하고 싶은 마음으로 주문을 하다니! 한편으로는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원두의 양, 높은 압력으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한다. 원두를 얼마나 넣고, 얼마의 시간 동안 뽑아내는지가 바리스타마다 다른데 그에 따라 맛의 차이가 생긴다고 한다. 물론 맛이 좋은 에스프레소가 되기 위해서는 잘 로스팅된 좋은 원두가 필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바리스타의 능숙도 또한 중요한 셈이다. 결국 에스프레소를 잘 내린다는 것은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물을 부어 희석시키거나, 우유를 부어 맛을 덮을 수도, 초콜렛이나 시럽을 넣어 맛을 감출 수도 없는, 에스프레소는 '기본에 충실함.'을 품고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커피다. 커피 본연의 맛만을 담고 있기에 얼마나 좋은 원두를 쓰는지 바리스타는 얼마나 정성을 쏟는지 어느 정도 유추를 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보통 바리스타들은  에스프레소 주문이 들어올 때가 가장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한다. 작은 실수도 금방 티가 나기 때문에.


'기본에 충실하는' 에스프레소를 기다리는 동안, 문득 예전에 지인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글을 쓰는,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 함께 한 자리였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글, 그림을 더 알릴 수 있을까, 사람들의 이목을 끌거나 입맛에 맞추어 작품을 찾도록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은 어떤지, 어떤 제목이나 카피라이트가 이목을 끌 수 있을지, 뭔가 있어 보이게 포장을 잘하여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떠올려보고 꺼내놓았다. 함께 고민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물들어 버린 채 집으로 돌아왔고, 귀동냥으로 담아둔 말들을 따라해보려 애를 써보았다. 물론, 한참을 그렇게 끙끙대다가 끝내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싶어 모두 내려두고 원점으로 돌아온 것으로 귀결되었지만 말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림과 글을 정성껏 쓰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기본에 충실하는 것, 내게는 그것밖에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기본에 충실한다는 말을 참 좋아한다. 맛있는 식당이나 카페를 찾아다닐 때도 본연의 것에 집중하는 곳을 마주하면 애정이 차올라 마음 한 켠을 가득 채운다. 그럴듯하게 이름을 짓고 인테리어를 꾸며놓거나, 유명세를 이용해 홍보를 하는 곳보다는 허름하면서, 심지어 SNS에 홍보 계정도 없는 오롯이 맛과 품질에 정성을 쏟는 곳을 좋아한다. 그곳의 맛을 경험하면서 나의 그림도, 글도 흔들리지 않고 늘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주문하신 에스프레소 나왔습니다."


바리스타 사장님과 나 사이, 길쭉하게 뻗은 바테이블 위로 에스프레소 잔이 올라왔다. 캐러멜 빛의 크레마가 부드러운 크림처럼 뽀얗게 진한 원액을 덮고 있다. 조그만 스푼으로 크레마를 살짝 떠서 맛본 다음, 휘휘 저어 향을 맡자 고소하고 진한 향이 올라온다. 한 모금을 살짝 마시고서 입 안을 따뜻하게 데운 후, 나머지 한 모금으로 뜨끈한 에스프레소를 꿀꺽 들이켰다.


‘스탠딩바’의 특성상 의자 없이 테이블 앞에 선 채로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했는데, 한잔을 모두 비우는 데에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만드는 방식도 에스프레소(Espresso : 이탈리아어로 '빠르다'는 의미)지만, 마시는 방식도 에스프레소였다. 모든 과정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는 잔을 바라보면서 기본에 충실한, 그 어떤 맛으로도 꾸미지 않은 에스프레소, 그 담백한 맛에 어쩌면 앞으로 가장 자주 찾을 종류의 커피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마셨습니다."


에스프레소바 사장님은 다음 손님을 위해 다시 분주히 커피를 내리고 계셨다. 테이블 너머로 수줍게 인사말을 남기며 돌아서는데 그도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에 충실하여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사람들에게 맛 보이고 싶다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사장님이라면 매일 카페를 찾아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내 마음도 다잡으면서.



참, 그날 맛본 에스프레소는 향이 좋고 맛도 부드러웠다. 달콤한 향미와 함께 깔끔한 신맛이 났다. 내일이 오면 또 이곳에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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