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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레 Apr 15. 2024

그녀는 왜 잡초 뽑기에 집착했을까?

나의 쓸모를 찾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이탈리아 시골에서 산골로

 남편과 나는 시아버지께서 아주 어릴 적부터 살았던 집으로 이사했다. 결혼 생활 6년 만에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소망했던 분가를 한 것이다. 아마도 이 집은 지은 지 못해도 50년은 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왜냐면 보자기 같은 천을 책가방 삼아 걸어서 산을 넘어 초등학교에 다녔다는 시아버지의 연세가 70이 넘으셨기 때문이다. 시아버지는 혼인 후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동네에 사시며 자녀를 키우셨고 산속에 자리 잡은 이 집에는 그의 어머니께서 90세까지 지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가 이탈리아 생활을 시작하기 훨씬 전에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이 집이 사람 손을 타지 않은지 적어도 10년이 흘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시아버지는 1년에 서너 차례 시골집을 방문하셨다. 겨울 동안 벽난로에 사용할 장작을 패러 오거나 무서운 속도로 사방을 뒤덮어 버린 덩굴식물과 아카시아 나무를 베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킨슨으로 인해 손떨림이 심해지자 운전 불가 판정을 받으셨고 그로 인해 몇 해 전부터는 아예 산골집은 관리가 안되고 있었다. 우리가 살기 위해 산골집을 방문했을 당시 사람이 사는 곳과 산의 경계가 모호해질 만큼 무성히 자란 잡초가 서서히 집을 집어삼킬 것처럼 보였다. 폐가에 방문해  본 적은 없지만 폐가란 이런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 안팎의 상태가 나빴다. 오래된 집 외벽은 칠이 다 벗겨졌고 당장 무너지지 않을까 싶은 굵직한 금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지붕에 물이 새는지 천장엔 커다란 얼룩도 있었다.


혼자 있을 수 있다면 어디라도 좋아

 정말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한 이유가 있다. 6년간 남편의 부모님, 형제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나는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친 상태였다. 어디서든 잘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건 완벽한 나의 착각이었고 적응은 쉽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탈리아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뒤 동양인이 흔치 않은 시골동네까지 코로나가 퍼졌는데 아시아인 구별이 어려운 현지인에게 나는 그저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혐오는 날카로운 비수로 날아와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타의적 은둔 생활은 무거운 우울감과 함께 타국 생활 부적응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 혼자 애쓰며 견뎌보려 애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뾰족하게 변해가는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새벽 기상, 운동, 책 읽기, 글쓰기 등을 하며 노렸했지만 마음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고 커지기만 했고 그렇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우고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고슴도치가 되어갔다. 견디다 보니 한계가 찾아왔다. 아무런 소리도 자극도 없는 곳에 홀로 남겨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고 살기 위해서라도 무자극의 상태가 필요했던 나는 혼자 있을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는 마음으로 산골집으로 이사를 했다.


로망을 이루고 싶다면 정글부터 정복하라

 첫 일주일은 집 내부 청소에 시간을 투자했다. 잔뜩 쌓인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내고 한시름 덜게 되자 정글처럼 온갖 식물들로 뒤덮인 창 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인들에겐 매일 잡초 제거를 하는 중이라 말했지만 내가 말하는 잡초와 그들이 생각하는 잡초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에게 잡초란 도자기처럼 반지르르한 얼굴에 삐쭉하고 고개를 내민 뾰루지처럼 눈에 거슬리는 몇몇 이름 모를 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 내가 고군분투하며 제거 중인 잡초란 무시무시한 가시를 뽐내며 나무 위까지 점령한 식물과 성인 키만큼 자라 피부에 닿으면 가렵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풀을 말했다. 제초기로 잘라도 돌아서면 쑥쑥 자라 있는 잡초를 뿌리까지 제거하고 싶었던 나는 눈뜨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하루 종일 풀을 베는 일을 무한 반복했다. 매일 키만큼 잡초 더미를 쌓아 올렸다. 자르고 뽑고 캐는 일을 한지 일주일이 지나도 집 주변은 여전히 정글 티를 벗지 못했다.

 낙엽이 지고 바람도 선선해지는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뜨거운 이탈리아의 태양 아래 한국인 DNA 소유자임을 티 내며 부지런을 떨고 있는 내게 이탈리아인 남편은 쉬라는 잔소리를 하기 바빴다. 아랑곳 않고 잡초를 뿌리 뽑겠다며 연신 괭이질을 하던 손목에 무리가 오기 시작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잡초 제거에 집착하고 있는 걸까?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나는 잡초 제거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의아한 생각이 들어 그 이유를 나름 추측해 세 가지 정도로 추려보았다.

 첫째, 나의 공간 : 안식처

 6년 동안 남편의 가족과 살다가 한 분가, 시아버지 소유에 시댁과 그리 멀지도 않은 집이지만 간섭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기쁨에 빨리 가꾸고 싶었던 것 같다. 그동안 인스타그램에 가득 저장해 둔 멋진 텃밭 사진처럼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은 욕심에 잡초 제거에 무아지경이었던 것이다.

 둘째, 우울감 떨쳐내기

 정신없이 움직이며 육체를 괴롭히면 잡생각 할 틈이 없다. 무기력과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특효약은 없었다. 잡초 제거는 '생각 off 스위치'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어두운 생각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울감을 떨쳐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셋째, 나의 쓸모를 찾아서

 이탈리아에서 전업 주부라는 직장은 내 삶에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집안일을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나게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지만 덕분에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일은 결코 없었고 마음도 텅 비어갔다. 100% 재능 기부 같은 집안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스스로의 가치와 쓸모를 찾기 위해 글도 쓰고 이모티콘 제작도 도전해 보며 애썼으나 성과가 명확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잿빛으로 뒤덮인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되진 못했다. 이런 나에게 잡초 제거는 자신의 쓸모를 바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일이었다. 머물렀던 자리는 티가 났고 집안일과는 달리 남편에게 고생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기에 더욱 집착했던 것이리라. 결국 인정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원인은 너무나 다양하다. 거기에 없던 애국심도 생겨나는 타국 생활은 한국에 대한 짙은 그리움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꼬리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때때로 나를 집어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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