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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정숙 Mar 18. 2018

달빛 그늘

둥그렇게 뜬 보름달, 잊고 있었던 추억의 한 켠을 불 밝혔다

나의 아버지는 십대 때부터 가족을 부양했다. 다섯 형제 중 맏이인데다 방탕했던 할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등짐도 지고 남의 집 머슴일도 마다 않았다. 일을 마치고 등을 펴면 캄캄한 밤하늘에 떠있는 보석들이 쏟아졌다.

'돈을 벌면 꼭 별자리 공부를 할 테야.' 아버지는 별을 보면서 천문학자의 꿈을 키웠다. 손재주가 좋아 고장 난 라디오를 고치는 것부터 시작해서 공장의 기계도 반나절 뚝딱 뚝딱거리면 잘 돌아가게 만들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손재주가 남달랐던 아버지는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제재소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보루네오 섬. 아버지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바다를 건너 배를 타고 목포를 거쳐 아버지의 발밑에 부려졌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들의 고향. 아버지에겐 나무가 고향이고 부모였다. 부모의 원망과 고된 일상이 한숨과 절규가 되어도 귀가 먹먹할 정도로 날카로운 톱날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쌩쌩 돌아가는 톱날 앞을 나무와 함께 한결같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만 하면서 사셨다. 절대 옆길을 가면 안 되었다. 제재가 삐뚤어지면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른 새벽이슬을 털면서 하루를 시작해 밤하늘의 숱한 별들과 신선한 달빛을 바라보며 퇴근을 하였다.


그 날은 달빛이 눈부시게 환했다. 고소하고 달큰한 찌짐 냄새에 슬쩍 몇 점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형제들 맛보게 할 요량으로 찌짐 한 줌 들고 옥상 옥탑 방으로 내달렸다. 엄마가 내 등짝을 올차게 후렸다.

“이노무 가쓰나, 콩나물 다듬어라 카이! 찌짐 손댈래? 마!!”
‘치, 친구들은 기찻길 너머에 모여 깡통 돌리기 하는데 난 가지도 못하고.’

슬금슬금 뒷꽁무니 빼서 옥탑방으로 올라가니 오빠와 동생들이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한다. 깡통 돌리러 가나 싶어 덩달아 따라 나선 길, 그 곳은 우리 집에서 가장 금기시 하는 동네 만화방이었다.

오빠는 만화방에 여러 번 와봤는지 구석 지정석에 앉아 전에 읽던 만화책을 꺼내는 듯 했다. 나와 남동생들은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또래 아이들과 나이든 오빠들, 아저씨들, 사방에 빽빽이 꽂혀있는 만화책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지된 곳의 선망, 엄마 아버지가 죄악시하던 만화방에 몰래 와서 앉아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만화방에 가면 왜 안 되는지 몰랐다. 무조건 만화방과 오락실은 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 뭘 읽을까 책장을 두리번거리는데 순간, 만화방 열린 문에 걸쳐져있던 오색 구슬발이 걷히는 것이다.
 
 
‘아버지!’
순간 온몸의 피가 수런거렸다. 아버지는 아직 제재소에서 코 밑 시커먼 기름을 분칠하고 눈썹에 흰 톱밥을 붙인 채 올곧게 나무를 켜고 있어야 했다. 여기 만화방에 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오빠와 동생들도 그 자리에서 벌떡 서서 얼어버렸다.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미처 옷도 갈아입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 나무 냄새를 풍기면서 우리에게 달려오셨다. 꽉 다문 입으로 쓰윽 웃으시더니 나오라는 손짓을 한 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성큼 성큼 앞서 걸으셨다. 동생과 나는 오빠가 어떻게 하는지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땅만 쳐다보면서 아버지를 뒤따라갔다.

“집에 가거든 밥 든든히 먹어라!”
앞서서 걷던 아버지가 갑자기 뒤돌아서서 바라볼 때 웃지도 화나지도 않은 표정이 달빛 그늘에 비춰졌다. 그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아버지 마음이 풀리셨을까. 추석날이라 용서해 주려나 했다.

하루 종일 기다린 명절 음식이었건만 잘 차려진 상 앞에서 형제들은 고개 푹 숙인 채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아버지는 유쾌한 모습이었고 우리에게 별 관심도 없는 듯 친지들과 얘기를 나누셨다.

“모두 다 옥탑방으로 오너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아버지는 만화방을 가지 않은 언니까지 호출했다. 형제들을 주르르 세운 뒤 맨 먼저 어리둥절했던 언니부터 바지를 걷어 올리라 했다. 아버지는 어디서 준비해왔는지 긴 나무막대기 한 자루를 내 놓으셨다. 철썩 철썩~~ 아버지는 표정하나 안 바뀌면서 언니의 종아리에 매질을 했다. 장녀가 동생들 안 챙기고 뭐했냐는 게 혼나는 이유였다.

종아리에서 짝짝 소리 날 때마다 눈과 어깨가 움찔거렸다. 오빠는 동생 넷을 데리고 만화방을 간 장본인으로 엄청나게 맞았다. 아버지가 준비한 나무막대기가 부러져나갔다. 그날 내가 맞았는지 내 동생이 맞았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빠는 종아리가 심하게 부르터서 잠 못자고 눈물을 흘리며 끙끙거렸다. 엄마는 “뭐 그래 잘못했다고 아를 잡냐!”며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오빠 다리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쉽게 잠들 수 없었던 그 밤, 무언가 어른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꿈인가. 뜨락으로 우술우술 쏟아져 내린 달빛이 옥탑방안 잠든 우리들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퇴근길을 지켰던 그 달이었으리라.

달빛이 방안 그득히 차 있는 동안, 큼지막한 아버지 손을 닮은 무화과 나뭇잎 그림자가 잠든 형제들 다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나뭇잎 붙박이 그늘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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