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폭풍우가 왔나 싶을 만큼 삶은 고요하고, 잔잔했다. 완벽히 일상으로 돌아와서, 평일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바빴으며, 주말에는 학생들과 함께 로보틱 대회에 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 CPT 비자 유지를 위해 매주 금요일마다, 50일 마일이 떨어진 곳에 가서, 3시간 정도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또, 나의 수업에 대해 5번 정도 참관으로 평가를 받아야 했다. 불평할 틈도 없이 바쁜 나날들이었고, 사랑하는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감사했다.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5달 조금 더 남았다는 생각에, 더 재밌는 수업을 하고 싶었고, 학생들에게 잘해주고 싶었고,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했고,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로보틱 대회 준비를 위해 평일에도 10시 넘어서까지 학교에 있고, 주말 중 하루는 학교에 나와야 했지만, 그만큼 아이들과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 모든 삶의 과정 중, "불안함"은 날 너무 괴롭혔고,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돌파구를 찾고 또 찾았다.
한국에는 자원 개발 관련 일을 하는 협회가 있는데, 지질학과 자원공학을 전공을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턴십을 연결해주기도 하고, 장학금을 주기도 한다. 대학교 3학년 때, 인도네시아 인턴십도 협회를 통해 쉽고, 편하게 갈 수 있었다. 협회에서 중동으로 석사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어 공고를 기다리던 중 협회와 연계가 있는 캐나다 K 대학에서의 석사 장학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학비가 면제되고, 매달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사실이 매력적이었으며 미국에서 캐나다로의 이사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침 지원 가능 범위에 있는 영어 성적도 있었고, 자원 개발에 관한 다양한 경험이 있었기에 "아, 이거다."싶었다. 한국에 있는 학과 교수님께, 추천서를 요청했고, 며칠 동안 지원서를 준비해 지원을 하였다. 자신이 있었고, 면접을 준비해야겠다 마음먹었지만, 예상외로 놀라운 답을 받았다.
"본 K대 공동 장학 프로그램은 지원 대상이 “특성화 대학 학부 졸업생 또는 졸업예정자”로서,
안타깝지만 귀하는 지원 대상 요건에 해당되지가 않습니다."
너무 실망한 끝에, 왜 안 되느냐 답변 메일을 보냈지만, 내가 졸업했던 학과는 특성화 대학 프로그램에 속하지 않았고, 따라서 나는 장학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 너무 화가 났던 나는 캐나다 K 대학에 개인적으로 지원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감당하기 힘들었던 학비에 포기를 했고, 뉴욕에 있는 어학원, 한국에 있는 어학원에 상담을 받았다. 내가 원하는 학과, 대학 등과 내가 가지고 있던 영어성적과 GRE 성적을 보내면 지원할 수 있는 대학원을 상담해주었다. 여러 곳들 중 가장 저렴한 곳들을 찾아서 상담을 받았지만, 2017년도 Fall 입학은 너무 늦었다고 했었고, 독일 유학을 추천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꼭 미주에 있고 싶었고, 2018년도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하는 방법밖에 길이 없을 줄 알았다.
학교에서 일하기 전부터, 교장선생님께서는 H1B 워킹 비자 스폰에 긍정적이셨고, 4월 초 신청을 위한 변호사를 알아보라고 하셨다. 변호사를 알아봐, 서류를 하나둘 준비하며, '아, 이게 될까?' 싶었다. 그렇게 삶에 대해 고민하고 나름의 준비를 하던 그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연처럼 한 남자를 만났다. 첫 만남보다 두 번째 만남이 좋았고, 두 번째 만남보다 세 번째 만남이 좋았고, 그렇게 교제를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던 사랑이 드디어 내게도 찾아왔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