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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계란 Jul 03. 2019

16. 첫 제자를 첫사랑같이 끙끙 앓다

한국에서 교생실습을 했었을 때도, 난 애들 이름을 외우지도 않는, 소위 말하는 시간만 때우는 불성실한 교생이었다. 애들과 같이 있는 시간보다, 학교 선생님들과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시간이 좋았고,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시간이 너무 좋았을 만큼 따분한 4주를 보냈었다. 그런 내 모습에, 절대 선생님을 하고 싶지 않았었다. 미국에서의 교생실습도 사실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호스트 선생님이 내게 아이들과 함께 할 기회를 많이 주지 않았었고, 나 또한 아이들과의 관계에 노력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호스트 선생님이 아이들 이름과 사진이 붙여진 병렬 표를 주었으나 백여 명의 이름과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얼굴들은 너무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 이름도 나한테 엄청나게 관심을 가져주는 몇 아이만 아는 그런 형태였고, 학교에 가기 싫어서 인터뷰를 보러 다니는 날이 더 신나기도 했다. 그렇게 마지막 날도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다른 교생 선생님들과 달리, 난 마지막 인사도 안 하고, 평소처럼 실습을 끝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나의 마음은 너무나 죄스럽지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닌 듯싶다. 아이들에게 사랑이 거의 없었던 내가 어찌어찌하여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고용해 준 교장선생님께는 지금도 너무나 감사하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100명은 참 부담이었다. 그 학교에는 오직 나만이 그 과목을 가르칠 수 있었고, 수업, 평가 모두 나의 재량이었다. 내가 평소 교직에 별로 큰 뜻이 없고, 학생들과의 관계에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엄청 걱정을 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가르치는 그 아이들은, 점점 나의 가족 이상이었고, 친구 이상이 되었다. 학교가 끝나는 날이 점점 다가올수록, 내년에는 이 아이들을 볼 수 없는 사실이 슬펐고, 정말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학교가 끝나고 하는 일은, 매일 코스트코에 가서 아이들 간식을 사고, 월마트에 가서 수업 재료를 사고, 재밌는 수업을 해보겠다고, 전자레인지도 빌리고, 오븐도 이용하고, 수업에 연관되는 활동들을 찾으려고 참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더 이상 나는 아이들 이름을 모르는 선생님이 아니었고, A는 무슨 과자를 좋아하는지, B는 무슨 과목을 좋아하는지도 알려고 애썼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도 어떤 장점을 가졌는지가 보였고, Teachers-parents conference에서도 누구보다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수가 있었다. Supervisor가 수업 평가에 들어올 때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수업에 잘 참여하게 하는지 알았으며, 평가에서도 굉장히 좋은 점수를 받았었다. 

                          

                                                                                                                                            



인생에서 고마운 친구 같은 사람들도 여럿 만났다. 나보다 1년 정도 더 먼저 일을 시작했던 생물 선생님 K는 학교 일을 넘어서, 개인적인 일도 털어놓고, 쉬는 날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항상 따뜻하고, 친절하고, 아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K를 보면서 초짜 교사인 나는 정말 많이 배웠다. 거의 혼자 밥을 먹다가, 매일 K와 함께 먹는 점심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함께 학교 근처 맛집 리스트를 뽑아, 탐방을 하기도 했다. 같이 근무를 시작했던 수학선생님 S는, 엄마같이 편안했다. 나의 투정도 들어주고, 서슴없이 조언도 해주고, 때로는 같이 욕도 해주었다.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S의 부모님 집에도 여러 번 갔었다. 영어 선생님인 A는 경력이 많아서 언니 같았다. 내가 나의 수업에 무엇이 부족한지 물었을 때, Observation을 해주고, 조언도 주고,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떤 아이들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팁을 굉장히 많이 주었다. 주말에도 여러 번 만나고, 장을 함께 보러 가기도 하고, 너무 많은 응원과 격려를 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정말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났다. 그렇게 이 아이들이 예뻐서, 매일매일 학교를 나가고, 아이들과 함께한 나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때쯤, 2017년 4월 초, 교장선생님께서는 H-1B 신청을 해주셨다. 하기 전에는 담담했었는데, 접수를 하고 나니, 더욱 불안했고, 긴장되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부모님은 학교 계약이 끝나고 나서, 나의 향후에 대해 걱정하셨지만, 그 무엇도 드릴 말씀이 없었다. 그렇게, 미국 생활을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4월 중순 봄방학을 맞이하여 라스베이거스와 LA 여행을 떠났다. 미국 동부를 처음 벗어나 본다는 생각에 신이 나기도 했고, 비행기에서 미국의 넓은 땅을 다시 한번 실감하기도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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