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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계란 Jul 09. 2019

18. 위험한 기회의 준말, 위기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들이었다. 봄방학을 지나, 학기의 끝 무렵이라, 학생들은 더더욱 산만했고, 통제가 힘들어져만 같다. 42분의 수업시간 동안 부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2017년, 5월의 첫날, 또 한 번의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쳤다. 1월에 우여곡절 끝에 겨우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CPT를 받았을 때, CPT는 5월 2일에 만료되지만, "CPT can be extended from May 2 2017, to the end of academic school year."라고 I-20에 쓰여있었다. 가을학기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의 수업료를 지급했고, I-20에 명시되어 있어 연장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안 해준다는 것이다. State exam 시험감독으로 정신없던 와중, 날벼락이 찾아왔다. 방학을 제외하면, 실상 일할 수 있는 날도 1달밖에 남지 않은 꼴이라, 어떻게든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계속 전화하고, 전화받고, 메일 쓰고, 메일 받고를 반복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이다. 도대체 몇 번이나 사람을 흔들고, 흔드는지, 5월의 첫날부터 어찌나 슬프고, 절망스럽던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지긋지긋한 미국을 떠나버리고만 싶었다. 누군가 흔들지 않아도 초짜 선생님은 힘들고 힘들었는데, 세 번이나 거칠게 흔들었다. 솔직히 이제 진저리가 나며, 비자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배웠고, 그저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게 세 번 흔들린 경험에서 나온 교훈이랄까. 



                       

                                                                                                                                            

그렇게 또 한 번, 겨우겨우 CPT를 허가해주어 6월 30일까지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몇 명을 제외하고 허가를 해주었기 때문에, 뭔가 일이 생길 것만 같았고, 조금만 잘못하면 일이 틀어질 것 만 같았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과 연락 없는 H1B 소식에, 5월 10일 집 근처 대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한 곳은 겨울에 알아보았고, 담당자를 만난 적이 있던 곳으로, 전공은 STEM education(Master of education)였다. 관심 있던 전공이고, STEM education을 가르친 경험도 있어서, 오래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다른 한 곳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는데, 내가 학부에서 했던 지구환경과학(Master of science)을 공부하는 곳이다. 내가 메일을 두 곳 다 보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대학원에서는 9월 입학을 마감하였었고, 장학금도 모두 끝난 상태였다 (나중에 미국 학부 4학년 친구들이 대학원을 1~2월에 지원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을 과감히 떠나는 다른 선생님에 비해, 나는 떨어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가 있었고, 미국에, 그것도 다른 주가 아닌, 여기 이곳에 꼭 남고 싶었다. 

                        



                                                                                                                                            

뭔가 터질 것만 하던 일이 실제도 일어났다. 주었던 CPT 허가는 취소를 당했고, 같이 일하던 모든 선생님들이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애원할 필요도 못 느꼈고, 이제 정말 끝이구나 싶었다.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Volunteer로 페이 없이 일을 할 때, 나는 과감하게 학기가 끝나기 3주를 앞두고, 아이들과 작별을 고했다. 물론, 페이를 받지 않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내게는 더 이상 소식 없는 H1B에 대한 미련도 없었고, 미국에 꼭 남을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부모님께서는 언제 돌아오냐,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냐고 매일같이 물으셨지만, 어떤 대답도 드리지 못한 채, 대학원 입학 마감을 10일 앞둔 채, 지원이라도 해봐야겠다 다짐했다. 가능성이 없어 보였지만, 다른 방도는 어느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휴일을 제외하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정말 정신없는 대학원 지원이 시작되었다. 추천서는 두 개에서 세 개가 필요했고, 성적 공증, 자기소개서, 연구 경력, 공인 영어성적, GRE 등 정말 많은 서류가 필요했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을 위주로 추천서를 받았고, 두 개의 전혀 다른 분야에 지원을 하다 보니, 자기소개서와 SOP 등을 전혀 다르게 써야만 했다. 교육 분야는 내가 미국에서 했던 프로그램의 담당자 K 박사님과 나의 수업에 대해서 5번 이상 평가를 했던 선생님께 추천서를 요청했다. 지질학으로는 인도네시아 인턴십을 총괄했던 담당자와 미국에서 과학교육 수업을 배웠던 M 박사님께 요청했다. 정신없이 썼지만, SOP와 자기소개서는 인터넷을 통한 교정, 미국 사람들을 통한 교정 등 5~6번의 수정을 통해 완성했다. 한국 대학에 대한 성적 공증은 다행히, 교사자격증과 H1B 신청을 위해 준비를 한 경험이 있어, 재발급만 요청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콩 볶듯이, 두 개의 대학원, 전혀 다른 분야에 지원했고, 메모리얼 데이 연휴를 맞이하여 4~5개월 전 예약해두었던 시카고 여행을 떠났다. 형편없던 GRE 성적, 제대로 썼는지 확실히 가지 않았던 SOP 등, 마음에 걸리는 것은 수만 가지였지만, 끝이 보이는 나의 미국 생활 중,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미국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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