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은계란 Jul 24. 2019

24.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미국인 박사 오빠가 도와주니 69점짜리 과제는 89점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수업 중간에 할 질문들을 박사 오빠가 집어주면, 몇십 번 속으로 중얼중얼거리고 연습을 해,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 21학점 들으며, 과외, 학원 등 온갖 일을 다했던 나였지만, 9학점이 참 버거웠다. 흔히들 사람들은 대학원 다닌다 하면, 학교 몇 번 안 가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집에 돌아오기 십상이었다. 11시가 넘어 집에 올 때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서 이렇게 살까 싶기도 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선생님이었다 학생이 된 것, 수입이 6분의 1 가까이 줄어든 것 등 모든 것이 조금씩 적응이 되었다. 하지만, 딱 하나 아무리 적응 안 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정을 주었던 학생들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미운 새끼 떡 하나 더 주잔 마음으로 잘해줬던 게 문제이었을까, 가족도 친구도 없던 내게 너무 기대서였을까.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학생들의 모습, 교실의 모습 하나하나, 학교의 복도까지도 꿈에 나왔다. 10월 마지막 주 학교의 운동회 날, 학교 주변에서 총기 사고가 났고, 총을 든 범인이 학교 캠퍼스 안으로 넘어오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강당에 소집시키고, 부모가 와야 집으로 보내줬다고 할 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화학 선생님이 학교에 출근을 안 하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내가 가르치던 학년 선생님이라, 그 자리로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용감한 건지, 무식한 건지 총기 사고 같은 건 아무렇지 않았다. 내가 학교에 방문했을 때, 학생들이 화학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페이 없이 봉사활동이라도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TA로써 매주 월요일 목요일 가르쳐야 하는 실험 수업이 있었고, 갈 때만 운전해도 1시간이 더 걸리는 거리였다. 그만큼 학생들이 그립고 또 그리웠다. 그렇게 싱숭생숭 11월이 되었다. 하나뿐인 동생이 군대에 갔다.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때쯤, 동생은 고등학생 있는데, 군대에 가는 모습이 참 어른 같았다. 힘든 군 생활 잘할 수 있을지, 누나로서 내심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적응력 빠른 동생은 누구보다 더 군대생활을 잘하고 있었다.





끝내지 못할 것만 같았던 첫 학기도 고지가 보였다. 지질학에 대해 열 장이 넘어가도록 영어로 쓴 내가 뿌듯하기도 했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내 모습이 또 달라 보였다. Academic writing과 Earth system은 A를 쉽게 받았지만, Advanced marine geology는 참 힘겹게 B+를 받았다. 원래의 나라면, 다시는 Advanced marine geology를 가르쳤던 S 교수님의 수업을 안 듣겠다고 했어야 맞는데, 들어야만 할 듯싶었다. 봄 학기 때도 또 S 교수님의 수업을 등록하는 나를 말리고 말렸던 박사 오빠의 말을 들었더라면, 두 번째 학기는 수월했을 텐데. 내가 지질학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선택하는 것처럼 무언가의 끌림이었을까. 종강했을 때, 4분의 1을 왔다는 그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지질학을 엄청 좋아하고, 분야에 엄청 관심이 있어서 석사를 하고 박사를 하는 사람들도 졸업 논문을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보였다. 하물며 그렇지 않은 난  오죽할까라는 생각을 하니까, 난 너무 어려운 길로만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도, 우리 학교는 문과 중심학교였는데 100명뿐인 이과에 가서 내신성적이 낮아졌고, 학부 때도 교직이수 안 했으면 성적도 좋았을 텐데 기어코 했나 싶기도 하다. 난 S 교수님 수업에 90%를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점수가 더 좌절하게 했다. 잔머리 굴려서 쉽게 쉽게 가는 애들도 있는데 난 융통성이 없을까? 내 인생은 왜 쉽게 쉽게 가는 삶이 아닐까. 누군가 답을 딱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끊임없는 질문들과 함께 선택하는 것도 어렵지만, 결정한 것에 책임을 지는 게 더 무겁기도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대학원에 와서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작고 작은 일들은 일어났지만, 수많은 일들도 마음의 상처가 가득 남았던 2017년의 기억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2015년 8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지, 2년 4개월 만인 2017년 연말, 처음으로 한국에 갔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아빠한테 난 여전히 어린아이였고, 그들의 품 안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혹여 한국이 너무 좋아, 미국으로 돌아오기 싫으면 어떡할까 걱정이었지만, 참 나답지 않는 생각이었다. 겨울 추위는 혹독했으나 한국의 겨울은 참 따스했다.





한국은 참 좋은 곳이다. 그곳에 살았던 "나"라는 존재는 안정된 삶을 살았었다. 대학 입시와 취업도 더 좋은 곳을 가기 위한 도전이었지, 단 한 번도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불안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안정되고, 행복했었더라면 왜 기억이 없는 것일까? 슬픈 이야기이지만, 한국에서의 삶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거리 풍경들 그 모두가 희미해진다. 한국에서의 삶은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반면, 미국에서의 삶은 모든 것이 불안정했지만 행복하다. 그게 내가 아직 미국에 있는 이유가 아닐까. 




To be continued...

작가의 이전글 23. 실낱같은 희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