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간의 스프링 브레이크를 끝나고 돌아오니, 여러 가지 점수들이 폭풍처럼 쏟아져 왔다. 퀴즈에서는 평균보다 0.4점이 낮았는데, 중간고사에는 다행히 평균보다 0.2점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잘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꼴등에서 평균에 가까이, 그리고 평균보다 높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Technical writing 과목에서는 교수님께서 나만의 단어로 다시 쓰라면서, 0/100을 주셨다. 그래도 Second chance가 주어짐에 감사했다. 몰아치는 과제들, 덕분에 집 드나들듯 다녀야 했던 Writing center는 미국에 돌아왔음을, 일상에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과연 나는 Geology 관련 일이 하고 싶은지, 아니면 Teacher이 되고 싶은지 확실히 정해야 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원한 전공 관련 인턴십들을 무심하게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한국 기업들에서 인턴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지원을 했었는데, 면접을 가게 되었다. 한국에서 내가 공채 때, 신입 채용 면접을 본 기업도 포함이 되어 있어서 기대를 잔뜩 했었지만, 면접에서 C를 만났다. 그것도 interviewer와 interviewee의 관계로. C는 교회에서 만난 같은 소모임 동갑내기였는데,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는 직장이 있었고, C는 대학 졸업반인 취준생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 안에 바뀐 자리와 내 모습의 변화에 면접하는 내내, 참 부끄럽고 비참했다. 그 많은 면접관들 중 하필, 역시 사람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인가. 그 뒤로 인턴십은 지원하지 않았다. 내 삶에서 충분히 많은 인턴십을 해왔다고 자부하기에, 그 선택에 대한 어떤 후회도 없다.
5월 말쯤, 이사를 가야 했기에, 집을 구하는데도, 이사 문제도 여러 가지 고민이 많다. 아무리 학비가 면제된다고 하지만, 2주마다 받는 Stipend 정말로 적고도 적은 금액이었고, 구할 수 있는 집과, 위치는 정말 제한적이었다. 돈과 엮이다 보니,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고,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앞을 내다보아도, 걸어온 만큼의 시간이 보였고, 뒤를 돌아보아도 걸어온 만큼 고난을 또다시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다음 학기에도 Graduate assistantship을 받을 수 있까를 정말 조마조마했고, 남은 1년만 눈 질끈 감고 살자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던 중, 학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비행기 표를 샀다. 아빠의 환갑으로, 아빠가 내가 한국에 오길 너무 바랬기 때문이다. 갈까 말까 수없이 망설였지만, 단 한 번도 아빠가 오라고 안 하셨는데, 이런 기회를 놓치면 불효인듯싶었다. 생각지도 못한 한국행이 갑자기 생겨서, 설레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안 간다고 완강했던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채, 어느덧 다가오는 비행기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미국 대학원 생활의 절반이 끝이 났다. 누군가 석사는 아기처럼 돌 수만 채우면 된다고 하던데,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입학하긴 했는데, 그와는 달리 내 삶은 결코 쉽지는 않았던 듯싶다. 웃음보다는 눈물이 많고, 기쁨보다는 고통이 많은 시간들이었기에 절반을 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어마어마했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성적이었다. Technical writing은 A를 받았고, Environmental geoscience도 A를 받았다. Stratigraphy는 A-를 받았는데, 저번 학기 때는 S 교수님께 B+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S 교수님께 A-를 받아서 더더욱 기뻤다. 만약에 1년 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나 쉬운 삶의 일부였다는 것을 이때 알았더라면 참 좋았을듯싶다. 그럼 나는 중간에 그만두었을까? 어쩌면 무식해서,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뒤를 돌아갈 수 있는, 지질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이때였다고 회상한다. 엄청난 기회를 잡은 것인지, 무언가를 놓친 것인지는 수년 혹은 수십 년 더 살아봐야 알지 않을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