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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Jan 31. 2023

삼십만 원보다 더 좋은 바지 하나의 선물

마음으로 숫자를 대체하자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우리 엄마가 남편에게 쓴 편지가 무척 인상적이어서 옮겨 적어본다.

“내가 넘어져서 무릎 깨졌을 때 바쁜 와중에도 뿌리는 소독약 사다 주고, 병으로 된 타이레놀 사다 주고, 늘 웃어주고, 내 팬트리 문도 고쳐주고, 현관문도 손봐주고, 밥 먹고 나면 늘 식탁 치워 주고, 항상 해월이 어지럽힌 바닥 닦아 주고, 당근 주스 만들어주고, 차 태워서 멀리 여행가 주고, 여행 가라고 돈도 ‘아무’ 주고, 맨날 무거운 거 다 들어 주고, 아빠의 다정한 술친구가 되어주고, 나한테 일일이 주식정보 알려주고,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다정다감한 현구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너는 별이야!!!”

이 엄마의 편지와 내 편지는 무척 비교가 되었는데, 나는 이런 편지를 썼다.

“늘 우리 가정을 위해 애쓰고 고생하는 남편. 우리 가족이 따뜻한 집에서 끼니 걱정 없이 발 뻗고 매일 저녁 잠들 수 있는 건 다 자기의 희생과 노력 덕분이라는 걸 알아. 그 노고를 내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자기가 내게 주는 것들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게. 생일 축하해.”

엄마의 편지와 내 편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나는 ‘고생’이라고 뭉뚱그린 표현을, 엄마는 하나하나 열거했다는 점이다. 남편은 ‘희생’, ‘노력’, ‘노고’ 같은 막연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 하나하나의 노력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줬다는 것에 감동했을 것이다.

편지뿐 아니라 선물도 달랐다. 나는 현금 삼십만 원을 남편에게 선물이라고 줬다. 남편은 늘 무얼 갖고 싶냐고 물어보면 필요한 게 없다고 하는 사람이라, 그냥 심플하게 돈을 주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다. 남편은 우리 엄마한테도 분명 똑같은 소리를 했다. 필요한 게 없다, 사지 말라, 그런 말들. 그러나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사위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찾아냈다. 너에게는 ‘겨울 바지’가 없다며 사 온 것이다.

돈이 바지 옆에 있는데 작은 선물같이 보였다. 삼십만 원은 쓰면 사라지지만, 바지는 시간이 지나도 남편의 기억 속에 남을 것 같아서. 나는 언젠가부터 선물 받는 사람 취향을 잘 모를 바에야 돈을 주는 게 낫지 않냐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남편이 자신에게 필요한지도 몰랐던 바지를 입어 보곤 멋쩍은 웃음을 짓는 걸 보니, 뭐야 필요한 거 없다더니 막상 사주니까 좋아하네 싶고, 내가 너무 쉽게 사랑하려고 했구나 싶었다.

대강 봐도, 그건 정성 그 자체다. 옷장에 없는 색깔과 패턴의 바지를 사서, 수선집에 가서 허리와 기장을 남편한테 잘 맞게 수선한 다음에, 상자에 고이 넣어 가지고 오는 정성.

엄마의 편지 중, '여행 가라고 돈도 '아무' 주고'라는 부분도 재미있었다. '아무'는 해월이가 '많이'를 말할 때 나오는 발음인데, "돈도 '많이'라고 쓰지 않고 '아무' 주고라고 썼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해월이는, 웬만한 건 다 많다고 한다. 아직 숫자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세 개 이상이면 대충 많다고 둘러대는데, 엄마가 돈 부분에서 고맙다고 언급할 때 해월이의 숫자 감각을 빌려온 것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주식 단타를 쳐서 용돈을 버는, 분명 숫자에 능통한 엄마가 갑자기 멍청해져서 두 살 배기 손녀의 언어를 빌려온 것은, 남편이 여행을 가라고 얼마를 줬든 그건 많은 돈이라고, 돈의 액수보다 중요한 건 너의 그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엄마와 나를 비교해본 이유는, 잘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의 편지에서 구체적으로 쓰기, 비유적 표현을 쓰기 같은 건 글쓰기 영역에서도 배울 수 있는 기술들이지만, 엄마가 글쓰기 기술을 알아서 저런 편지를 쓴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엄마는 현구가 자신에게 준 것을 하나하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고 고마워했다.

잘 살아가는 사람은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믿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삶을 정성스럽게 사는 사람은 티내려 하지 않아도 글에 묻어나올 것이다. 무엇을 쓰는지 보면 어떤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남편에게 선물이라고 돈을 줘 놓고는, 숫자로는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됐던, 그런 생일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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