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도 읽지 못하고 하루가 끝날 것 같은 날에는
시를 읽자, 아이의 동화책을 펼쳐 보자
어제는 아이가 새벽 한 시에 번쩍 눈을 떴다. 우유를 달라고 하더니, 몇 시간을 자지 않고 버텼다. 새벽 내 보채는 아이를 받아준 후유증으로, 아직도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이런 날에는 화가 나기 쉽다. 아이가 똑같이 물을 쏟아도, 남편이 똑같은 말투로 말을 걸어도.
아까 아이를 재우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러나, 그 어떤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리잔에 우유를 붓고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놓는데, '쨍'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거슬렸다고 해야 하나, 그 한 음절의 소리가 꼭 연주되지 말아야 할 악기였던 것처럼 마음을 움켜쥐었다. 유리잔에 부어지는 우유가 아무 생각 없어 보이고 약이 올랐다.
그런 감각을 느끼고 나서는 박시하의 <구체적으로 살고 싶어>가 곧바로 생각났는데, 나는 '어떤 기분일 때 이 음악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꼭 그런 기분일 때 이 시를 읽어야 하는' 몇 가지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아래는 박시하의 <구체적으로 살고 싶어> 전문이다.
젓가락, 접시, 소시지, 오렌지주스, 달걀……
그런 것들이 될 거야
사물이 된다면
달그락거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은 언제나 숨겨지고
수평선은 어둠을 끌어올리지
어둠에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거야
눈물이 나는 건
물새떼처럼 알 수 없고
구름처럼 멀리 있는 것들 때문이지
가라앉아서 숨을 쉬자
물고기가 된다면
수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삶은 사라지게 될 거야
아무것도 슬프지 않을 거야
독서에 있어서도 '효율'을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동화책이나 시읽기가 가장 가성비 높은 독서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고 나서는 동화책을 많이 읽게 된다. 어른이 읽는 책 보다 글자의 양은 명확히 적지만, 심금을 울리는 책들이 있다. 그림이 들어가서 더 그럴 것이지만.
오늘은 ‘유리 슐레비츠’가 쓰고 그린 <눈송이>를 읽기도 했다. 책 한 권을, 일 분이면 읽을 수 있다. 처음 읽고 나서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은 아침에 눈이 와서 그런가 다시 읽고 싶었다. 밖에 나갔더니 눈이 쌓여 있었다. 하얀 눈은 마법 같았다. 내리기만 하면 쌓이니까. 뉴스가 눈이 오지 않을 거라고 해도, 기어이 내리고야 마는 눈은 있다.
날씨 같은 것들이 당연한 듯 지나가고, 하루가 끝나면 밤이 온다. 무엇도 읽지 못하고 하루가 끝날 것 같은 날에는, 시를 읽자. 아이의 동화책을 펼쳐 보자. 오늘 같은 날은, 특히 너무 피곤하니까. 유리잔을 식탁에 올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나는 지금 예민하니까.
소설은 너무 길어서 잘 안 읽고, 누군가 쓴 에세이도 조금 지루해진다 싶으면 바로 몇 문장씩 건너뛰고 읽어 버리는 나는 지루한 것이 가장 참기 힘들다. 어떤 것의 시작과 끝을 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삶을 살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도, 시는 논리라기보다 '삶의 파편을 감각에 따라 진열'해놓은 것에 가까워서, 삶으로 읽으면 되고, 시가 끝나도 여전히 그 기분이 이어진다. 소설이 바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면, 시읽기는 깊은 바다로 한 번에 다이빙하듯 푹 젖어 버리는 것이다.
모래사장을 걷느라 다리에 힘을 줄 필요도 없이, 신발과 옷을 벗을 필요도 없이, 오늘은 그냥 푹 잠기고만 싶다. 노래 한 곡에 시 한 편, 동화책 한 권으로 오늘의 내 기분을 대신해 놓고 나는 그것들 속에 숨어들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인, 아마자라시의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을>을 유튜브 뮤직으로 틀어 놓고 이 글을 쓴다. 창작보다 소비를 하고 싶은 감각에게, 진정해. 내일은 또 다른 글을 쓸게. 오늘은 우선 쉬자, 하며 어깨를 토닥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