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도하 May 26. 2020

'그렇고 그런'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




절대 잊혀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순간들이 잊혀지고, 절대 잊혀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사랑도 잊혀지고, 절대 저렇게는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어른이 되어 살아간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




일상이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의미를 띤다. 누군가에게 일상이란 평화롭고 소중한 무언가다. 그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봄날의 햇살에 감겨 있듯 애틋한 기분에 잠기기도 한다. 반면 누군가에게 일상이란 1분 1초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 한복판이다.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다. 총알이 언제 어디서 날아와 머리를 관통할지 몰라 곤두세운 채 밤을 지새우다 이른 새벽녘 대문을 나서면서 시작되는 무언가다. 그럴듯한 무기도, 전략도, 함께 전사할 동료도 없이 각개전투를 벌여야 하는 절대 고독이다. 




내게도 그런 거다.

산다는 건 그리고 나이 먹어간다는 건.




불행인지 다행인지 신은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능력을 주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치열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삶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것들을 잊는다. 불행했던 대소사도 잊고, 밤마다 이를 갈게 만들었던 철천지원수도 잊고, 뼈에 새기리라 다짐했던 사랑도 잊고,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라고 말했던, 부질없고 유치하지만 찬란했던 순간들도 잊는다. 그렇게 잊고 또 잊다가 어느 날 기억의 색인이 무의식의 둑을 허물어버리고 밀려드는 기억에 머리끝까지 잠길 때면 공허와 허기를,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가끔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다가 햇살이 이마 위에서 미끄럼을 탈 때 공연히 눈물 흘린다.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무사히 통과하여 지금 이 자리에 앉아 햇살을 맞고 있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서 운다. 너무나도 소중했기에 내게 고통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 허무해서,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덧없어서 운다. 영원이라는 단어를 믿었던 나의 순수가 유치해서, 그러나 유치하다고 느꼈던 가치들이 실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게 원통하고 분해서 운다.




반복적인 일상은 서서히 우리를 잠식한다. 우리는 공업용 포르말린 속 무력한 표본들처럼 이 공업사회 안에서 무감해진 채 각자의 형태로 굳어진다. 누군가는 이를 축복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이를 고통의 산실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어른이 되어가는 것뿐이라 말한다. 무엇이 옳든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위해 고독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때론 잊어가기도, 잃어가기도 하면서.




내일도 나의 친구는 모두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 하루를 시작할 것이고, 집 앞 편의점 알바생은 지난한 표정으로 바코드를 찍을 것이다. 완전무결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투의 현장 속에서 나는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바닥에 떨어진 탄피를 주우러 대문을 나설 것이다.




오늘도 살아 있다. 그것이 슬프고 애석하다. 그리고 다행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