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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도하 Mar 31. 2021

죽기 직전 떠올리는 것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때때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언제, 어떤 모습, 어떤 사유로 죽음을 맞이할까. 인간 실존에 대해 고뇌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도래할 '나의 죽음'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보기 마련이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죽을래?'라는 격한 농담을 입버릇처럼 사용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들을 떠올리고 엄숙해진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각자가 속한 세대와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관과도 관련이 깊다. 생존이 곧 삶을 유지하는 근간이자 정체성이었던 기성세대들은 죽음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아서라, 말이 씨가 된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삶이냐 죽음이냐를 논하는 실존주의보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를 논하는 '싫존주의'가 훨씬 중요한 화두인 밀레니얼 세대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라는 허무주의의 시조 격인 문장을 먹고 행하고 사고하는 근거로 삼는다. 무속 신앙의 그늘 아래 터부시되었던 죽음은 시대의 변혁을 거치는 동안 제법 시니컬하고 가벼워졌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어느 집단, 어느 세대에 속한 사람이든 누구나 죽음의 순간 - 일말의 예측과 준비가 불가능한 그 절대적 순간 - 을 한 번쯤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삶의 기억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간다'라는 문장이 죽기 직전의 순간을 대변하는 관용구가 된지 오래다. 실제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나온 궤적이 주마등 혹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말한다. 놀라운 건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켜켜이 포개지고 응축된 몇 십 년어치의 기억들이 슬로 모션을 걸어놓은 속도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넘겨본 적 없는 나로서는 죽음 직전의 감각이란 마치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자손이 주는 행복을 느껴보려 애쓰는 것만큼이나 모호하게 다가온다. 




죽기 직전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무엇일까. 누구의 얼굴이며 어떤 기억의 편린일까.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반려동물, 첫사랑... 저마다의 답변이 쏟아진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우리가 유추하는 이미지일 뿐, 실제 죽음이 도래했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 그 불가지론적 화학 작용을 -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나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족들의 얼굴이나 못다 한 소명 대신 노트북에 꽂혀 있는 외장하드 속 부끄러운 기록들을 반사적으로 떠올린다. 외장하드 속에는 오욕과 수치, 모멸, 분노, 슬픔, 희로애락이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정리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다. 훗날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외장하드를 정리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의 기록들은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들에게 발췌되어 낱낱이 분해되고 일부는 왜곡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진 나는 재빨리 외장하드를 열어 기록들을 삭제하곤 한다. 




그렇다. 원래 나는 그리 고매한 인간이 못 된다. 그러니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슬픔보다 책임 소지를 떠난 불명예와 수치심 따위나 지레 염려하는 것이다.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가 있다.








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중략)








<죽고 난 뒤의 팬티>는 죽음이라는 불가지론 앞에서 한 인간이 떠올리는 단상을 통해 사회적 동물의 죽음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시인은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후, 자동차 속도가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그날 입은 팬티를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고질병에 걸렸다. 내가 오늘 아침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더러운 팬티를 그대로 입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팬티를 보게 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진 않을지, 우스꽝스러운 팬티가 엄숙해야 할 나의 죽음을 훼손하는 건 아닌지, 뭐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죽음은 가장 그럴듯한 면죄부이자 온전한 해방이다. 한 사람이 물리적 죽음을 맞이한 순간, 살아생전 짊어지고 있던 책임과 그로부터 파생된 모든 감정들은 그의 손을 떠난다. 만약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 한들 오늘의 팬티와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건 남아 있는 사람들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걸 준비한다. 자살하기 직전 사후 처리 비용 견적을 묻고, 사지가 분쇄기에 갈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사망보험금의 액수를 헤아린다. 반려동물이 혹시라도 너무 늦게 발견되어 굶어죽지 않도록 목을 매기 전 한 달 치의 사료를 구입하고, 나의 슬픔은 잠시 뒤로 미뤄놓은 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유서를 쓴다. 




최근 뉴스 기사에서 읽었던 회사원의 이야기도 있다. 출퇴근 길에 불미스러운 교통사고에 휘말린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순간마저도 회사에 가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결국 그 말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업무 불이행과 인수인계의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한 개인의 죽음은 때론 사회 전반에 걸쳐져 있는 부조리를 들춰내 우리를 씁쓸하게 만든다. 사후 처리는 물론 나의 죽음을 목도할 누군가의 시선까지 대비한 후에야 안심하고 눈 감을 수 있는 사람들. 그게 소위 말하는 '요즘 사람들'이다. 죽음마저 통제하길 원하는 고차원적 욕구일까, 눈치 문화에서 비롯된 기형적 강박일까. 우스꽝스럽지만 슬픈 사연들을 접하다 보면 결국 죽기 직전 떠오르는 무언가란 우리 삶을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정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 시간 후, 나는 팬티를 갈아입고 집을 나설 것이다. 집에 돌아와선 냉장고를 깨끗이 청소하고 화장실 쓰레기통을 비운 후 습관적으로 인터넷 쿠키 기록을 삭제할 것이다. 어쩌면 내일이 될 지도 모르는 나의 죽음은 대부분이 그렇듯 별반 대단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이 죽은 사람의 팬티를 오래 기억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는 건 나 역시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게 삶보다 더 절실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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