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이 우리는 문학을 함으로써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한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아무러한 반성 없이 9시에 회사 문에 들어서서, 잡담하고 점심 먹고, 5시에 퇴근하는 그런 일과가 월화수목... 계속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에,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뒤를 보지 못하는 갇힌 의식에, 문학은 그것이 진실된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_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국문학의 위상』, 문학과 지성사, 1977.
대학교 학부 시절, 남들은 앞다퉈 복수 전공하려던 경영학이 내 체질엔 맞지 않아서 일찌감치 전과를 하려 했었다. (그렇다, 나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전과를 하려고 보니 하필 학교에 마땅한 전공이 없어서 차선책으로 국문학을 복수전공으로 택했더랬다. 경영학과면 경제학을 복수전공해야 취업할 때 좋다고들 했지.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날이 서 있던 터라 그런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잣 까라 그래, 난 내 갈 길을 간다'를 외치던 머저리 시절)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나는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4지 선다형 문제나, 수학공식을 써 내려가야 했던 경영학 전공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험은 오픈북으로 치러졌고 답지는 B4 사이즈 백지였다. 커다란 B4 종이에 신나게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갔던 기억이, 팔이 아프도록 논리와 근거를 써 내려간 기억이, 나의 대학시절 중 가장 즐거운 기억이다. 그런 공부가 계속하고 싶었다. 스물네 살이던 나는 내가 갈 길을 꽤 명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꼴에 경영학을 먼저 전공했답시고, '돈이 안 될' 냄새는 맡았었나 보다. 대학원을 가려고 돈을 모으기 위해 시작했던 회사생활이 이렇게 얼룩진 채 길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어국문학 중에서도 가장 잘 맞았던 건 비평이었다. 뭐든지 꼬아서 보고 까기 바빴던 그때의 나에게는 이렇게 찰떡같이 잘 맞는 학문이 없었더랬다. 비평 수업에서는 텍스트도, 콘텐츠도, 사회현상도, 사회 흐름도 모두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다. 어딜 가나 '찬물 끼얹기'의 달인이었던 나, 지금으로 치면 '프로불편러'였던 내가 전혀 이질적이지 않던 어쩌면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툭하면 "네 꿈이 뭔데? 네 꿈이 대기업 취직하는 거냐? 그럼 그다음은 뭔데? 다들 취업하니까 너도 하려고 하는 거 아냐? 다들 하는 게 정답이란 건 누가 정한 건데?"라며 답도 없는 꼬투리를 잡고 다녔다. 절레절레..)
내가 하던 '찬물 끼얹기'가 비평에선 필요한 거였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그 이면을 보는 것. 얕게나마 비평을 배우면서 자연스레 기호학에 관심이 생겼다. 부유하는 기표들 아래 가려진 기의에 대해. 우리의 무의식을 교묘히 지배하며 조작하는 거대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리고 그걸 마주하게 하는 비판적 사고방식을 어떻게 이끌어내냐에 대해서도.
서두에 쓴 인용문은 저명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한국 문학의 위상> 의 일부다. 국문학을 짧게나마 공부하면서 여태껏 품고 지내는 문장 중 하나다. 부도, 권력도 쥐어주지 않는 무쓸모한 문학에서 쓸모를 찾아내고 있다.
계속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에,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뒤를 보지 못하는 갇힌 의식에,
문학은 그것이 진실된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우리의 의식은 경계하지 않으면 너무 쉽게 게을러진다. 그 의식을 방만하게 내버려두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나아가 문학과 맥을 같이하는 예술작품들일 것이고. 특히나 문학은 텍스트로만 이뤄져 있기에 시청각을 자극하는 다른 장르보다 독자의 생각 회로가 가장 다양하게 얽힐 수밖에 없다. 비판적 사고는 거기서 비롯된다.
졸업을 미루고 싶었던 유일한 이유는 비평 공부를 더하고 싶어서였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나의 진로는 꽤 뚜렷했다. 재능이 있든 없든 간에 이토록 흥미가 짙었던 분야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돈 안 되는 길고 험한 길이라고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았어서 그렇지. 사회에 나와 월화수목금 생각 없이 출근을 하며 "시를 배반하고 살"았다. 당장 회사 일이 바쁘고 회식에 치이니 비판적 사고할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당장 몸과 마음이 힘드니 술이나 음식처럼 단순히 감각을 자극하는 안정제를 찾았고, 그 삶에 젖어들어갔다. 사회에서 버티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지내기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회사에 붙어 있으면 있을수록, 업무에 익숙해질수록, 내 시야는 좁아져갔으니까. 문학은 사고의 나태함을 다잡아주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리고 몇몇 좋은 영화들도.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부정한 힘을 인지한다.
4월에 개봉하는 영화 <바이스>는 미국 부통령 '딕 체니'의 전기 영화다. 대통령을 꿈꿨지만 부통령의 자리에서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한 체니의 이야기. 그가 재임하던 시절, 우리는 그가 교묘히 심어둔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말 한 마디면 평화롭던 나라 하나가 쑥대밭이 되어버릴 만큼 굉장한 파급력이 있는 일도 우리는 '그런가 보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당장 편하고 자극적인 것들을 소비하게 바쁠 뿐. 사람의 손이 닿는 이상 그 어떤 것도 '그럴 만해서' 일어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얼마나 교활하고 또 나약한 동물인가.
비평 강의에서, 한 선배가 "우리는 왜 '과잠'을 입는가"라는 주제를 두고 발표한 적이 있었다. 과잠으로 할 얘기가 과연 무얼까 싶었는데 머리가 뎅- 울렸다. 고작 옷 하나에도 할 얘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귀찮아서 아무렇게나 입기 좋아서 입는 게 과잠인 걸까. 과연 그 편의성에만 그치는 옷일 뿐일까. 좋은 학교 출신이라는, 꽤 괜찮은 전공을 하고 있다는 우월의식을 사람들아 잘들 보시라고, 가슴팍에는 학교 심벌을, 등판에는 학교명을 대문짝만 하게 새겨두는 대학교 과잠인데도 말이다. 과잠을 입음으로써 느끼는 상대적 우월감 혹은 열등감, 그리고 소속감. 과잠을 보면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천편일률적인 무리 의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심코 집어 든 과잠에도 수많은 무의식이 휘감겨 있다. 짧게나마 배운 비평은 강의 이후의 내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주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영화 <바이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하고도 남을 테니, 감정적인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은 좋은 영화를 만난 그 반갑고 설레는 감정 그대로를 글로 옮기는 게 맞을 것이다.
쟁쟁한 배우가 출연하는 만큼 연기가 무척 인상 깊었고, 과감한 연출과 편집도 돋보였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실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치우치지 않고 통쾌하게 풀어낼 수 있었던 건 연출과 편집 덕분일 것이다. 같은 시각, 그리 멀지 않은 장소, 그러나 너무도 상반되는 환경에 처한 두 인물을 교차해 보여주는 편집이 인상 깊었다. 성명서 발표를 하는 부시가 의자 아래서 습관처럼 다리를 떠는 모습과 부시의 그 성명 때문에 시작된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공포에 질려 다리를 벌벌 떠는 한 남자의 모습이 교차 편집된다. 그리고 체니의 병든 심장과 새로운 심장이 교체되는 장면까지. 또 체니가 부시에게 하는 제안과 낚시 장면이 교차되는 시퀀스도 볼만 하다. 이런 유쾌하고 통쾌한 연출과 기법이 없었다면 체니의 마지막 멘트는 너무 노골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극적인 콘텐츠만 소비하며 환호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회피하며 미끼에 홀리는 물고기 떼처럼 살아간 것은 누구였나. 화려한 미끼에, 혹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미끼에 현혹되거나 매몰되며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것은 누구였을까. 그 머저리들이 바로 우리라고 한다면, 우리를 그렇게 현혹한 미끼를 풀어놓은 낚시꾼은 과연 잘못이 없을까.
애초에 당신은 왜 물 밖에서 우리를 실험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인가.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당장의 밥벌이에 매달리게 하고, 그럴듯한 미끼들을 사방에 흩어놓아 정신 팔리게 한 것은 낚시꾼, 당신이지 않은가. 그런 그에게 낚싯대를 쥐어준 것은 놀랍게도 물고기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물고기가 그에게 낚시꾼 역할을 주고 낚싯대까지 곱게 쥐어주는 일을 마치 옳은 일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 것은 낚시꾼이고.
낚시꾼은 절대로 낚싯바늘을 자기 자신을 향하게 하지 않는다. 입질이 올 때까지 좋은 시간과 장소를 찾고 때를 기다린다. 낚시꾼의 존재조차 모른 채 미끼를 물고 죽느냐, 그 존재를 알면서도 현혹되느냐, 혹은 (고작) 바위 뒤에 숨어 절대로 현혹되지 않을 것이냐는, 가녀린 물고기들이 판단하고 선택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