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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Nov 28. 2018

끝을 아는 여정을 시작하며, 영화 <저니스 엔드>

그리고 여정은 그렇게 끝난다.


여정의 끝을 안다는 건


우리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생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유한함이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 죽음이 언제일지는 모르니까. 만약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보고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있는 존재였다면 세상은, 글쎄 더 평화로워질까 아니면 더 혼란스러워질까.



<저니스 엔드>는 제목에서부터 끝이 정해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영화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스탠호프' 대위의 부대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대공습이 시작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 최전방을 돌아가면서 지키는 부대 중 어떤 부대가 대공습의 첫 번째 표적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스탠호프 대위의 부대가 최전방을 지키기 위해 교대하자, 대공습이 바로 이틀 뒤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여정의 끝을 알면서도 참호를 지켜야 하는 스탠호프와 병사들. 술에 의존하고 서로를 할퀴면서 이틀이 흐르고, 참호에는 끔찍한 긴장감만 감돈다. 그리고 공습은 시작된다. 



여정을 가까이서 함께하는
카메라 기법


영화는 전쟁의 대서사시를 다루지 않는다. 극히 일부인 사건에 집중하며 그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심리를 조명한다. 숱한 전투를 거치며 책임감과 불안함 때문에 술독에 빠진 스탠호프와 점점 전쟁의 참상을 받아들여가는 롤리, 그리고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려 감정을 묻어두는 오스폰까지. 1차 세계대전을 말할 때 단 한 줄로만 설명되고 말았을 그 사건과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그래서 영화 신의 대부분은 클로즈업 컷이다. 최전방 참호 자체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긴 하나 전체 공간을 보여주는 신은 극히 적다. 희곡이 원작인 영화이기도 하지만, 공간의 제약처럼 느껴지는 신 활용 때문에 영화로 옮겼음에도 연극처럼 보였다. 카메라 앵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소 노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형식적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대공습 후 스탠호프의 부대가 전멸하고 영화는 끝난다. 여정은 그렇게 끝난다. 대공습 후 독일군이 참호를 확인하러 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 앵글은 버즈 아이 뷰로 공간을 보여준다. 비로소 관객은 최전방 참호에서 심리적으로도 한 발짝 물러 서서 상황을 볼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클로즈업으로 표정을 보여 줄 주인공은 없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대공습으로 사망한 참전군의 숫자를 자막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관객의 여정도 그렇게 끝난다. 최전방 참호의 질퍽이는 진흙 바닥과 긴장감 가득한 서늘한 분위기를 함께 하던 영화적 체험이 끝나는 것이다. 카메라 앵글이 하늘로 빠지며 조감도를 비추는 순간, 관객은 여정이 끝났음을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조감도가 필요한 걸지도


영화에서 다룬 역사적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더라도 배우들의 열연 덕에 긴장감을 유지하기에 충분하다.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모르더라도, '여정의 끝'이라는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된다. 그럼에도, 끝을 아는 여정임에도 감정에 충분히 이입하여 영화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참혹한 상황을 한 세기가 지난 후에 '영화적 체험'이라 칭하며 논한다는 게 부끄럽지만 말이다. 정확히 백 년 전 일이다. 참전한 군인들은 지금의 나보다 한참은 어렸을 것이다. 얼마나 겁이 나고 두려웠을까, 그 몰아치는 감정을 어떻게 떨쳐냈을지 상상하면 아득해진다. 공습 전의 긴장감과 전장의 참혹함은 영화가 완벽히 옮기지는 못했을 테니, 영화적 체험이라고 일컫기도 조심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쟁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상황과 인물에 감정이 이입되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끝을 알면서도 욕심을 내어 달려드는 인간의 모습은, 어리석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임을 알면서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다. 인간은 새가 아니기 때문에 버즈 아이 뷰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여정의 끝은 죽음이고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지만, 인간은 마주한 인간을 적으로 두고 한 치 앞만 보며 살아갈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여정의 끝이 언제인지 알든 모르든, 영원히 서로를 괴롭히며 복잡하게 살아가겠지. 카메라 앵글을 빼듯, 인간도 버즈 아이 뷰를 할 수 있다면 조금은 달라질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인간이 너무 싫어진다. 그러다 좋은 작품이나 사람을 만나면 다시 좋아지기도 하고. 나도 여정을 살아내고 있음에도 인간을 적으로 두려 한다. 당장 나부터 버즈 아이 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영국 개봉 시 인물 포스터. 'LEST WE FORGET'이라 적혀 있다.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버즈 아이 뷰 얘기를 했지만 사실 이렇게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면 인간사가 다 뜻없어진다. 한 걸음 멀리 떨어져서 보면 객관성은 취할 수 있을지 몰라도 회의주의에 빠지기 쉬우니 선을 잘 지켜야 한다. 애국의 뜻을 품고 전장에 뛰어들었을 모든 소중한 영혼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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